나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11월호 주제는 ‘나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입니다.
초등학교 때 엄마와 자주 가는 목욕탕이 있었다. 탕에 들어가 앉아 나는 갑자기 엄마에게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다. “엄마, 나는 누구야?” 탕의 따뜻한 온기가 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뜨거운 김이 꿈속임을 착각하게 했는지 나도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한 건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너는 내 딸이지.” 나는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리고 또 누구야?” 그때, 엄마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유진이는 어진 사람이지. 네가 동생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걸 보면 엄마는 네가 대단하게 느껴져”
그 말을 들었을 때, ‘어진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갑자기 훅 들어온 엄마의 칭찬에 안 그래도 뜨거운 탕 속에서 얼굴이 빨갛다 못해 붉어졌다. 부끄러움에 몸이 움츠러들며, 나는 얼른 “어진이가 아니고 유진이야”라고 대답하고는, 급하게 탕을 나왔다.
최근, 엄마와 통화하던 중에 엄마가 갑자기 그날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다.
"유진아, 너는 어진 사람이야. 나는 너의 엄마지만, 너는 내가 봐도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워. 네가 반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엄마도 많은 걸 배우게 돼" 시간이 지나 듣는 말인데도 여전히 이 말이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엄마가 예전에 해줬던. 말이네" 하고 무심히 대답을 했다. 속으로는 그 말을 계속 되새기면서. 그런데 엄마는 정작 "그때 그런 말을 했었나?" 하시며, 그날의 이야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교사가 되어 내가 자주 하게 되는 질문 중 하나는 "나 누구야?"였다. 아이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고, 그 이름을 기억하게 해 주기 위해 했던 질문이었다. 아이들이 대답을 하면 나는 웃으며 "맞아! 정유진 선생님!"이라고 말해주고, 대답이 없으면 "정유진 선생님이야" 하고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그 후에도 나는 같은 질문을 자주 했다. "나 누구야?" 반복되는 그 질문 속에서, 아이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우리가 함께한 소중한 추억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나도, 표현이 자유로운 친구들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우리의 추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님, 그때 내 생일 파티 했었잖아요. 진짜 재밌었어요.” 목소리에서부터 그때의 즐거움이 묻어난다. “선생님, 그때 우리 수학여행 갔을 때 기억나요?”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한 작은 부분까지 술술 풀어놓기도 했다. “선생님, 그때 돗자리 깜빡했잖아요. 그래서 옆 반 선생님한테 빌렸잖아요.”
표현이 서툰 친구들에게는 내가 먼저 우리의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어 펼친다. "이거 기억나? 저거 기억나?" 그리고 그전에 항상 묻는 질문이 있다. "선생님, 누구야?" 나를 기억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혹여나 대답을 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보는 표정에서 알 수 있다.
5년간 근무했던 학교를 떠나 새로운 학교로 옮겼을 때, 이전 학교에서 연수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연수 신청을 했다. 택시를 타고 서둘러 가면 연수 시작 시간까지 5분 정도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소식을 들으신 어머님께서는 “선생님, 5분이라도 괜찮아요. 조금밖에 못 봐도 기다릴게요.”라고 말씀하셨다. 덕분에 나는 작년에 제자들 3명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방과 후를 하지 않아 일찍 하교하였다.)
교문 입구에 들어서자, 소연이는 스쿨버스 시간이 다가와 나를 못 보고 가게 될까 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민우와 지윤이는 왜 집에 안 가지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먼저 소연이를 안아주며 "소연아, 보고 싶었어. 잘 지냈지?" 하고 묻고, 사온 간식을 가방에 넣어주며 "이거 집에 가서 먹어"라고 말했다. 소연이는 나를 꼬옥 안으며 "선생님, 못 보는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고, 짧지만 깊은 안부를 나누며 버스를 탔다.
그 후, 민우와 지윤이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지윤이에게 나는 자연스레 물었다. "지윤아, 나 누구야?" 지윤이는 언제나처럼 "정유진 선생님!" 하고 대답하고는, 그 뒤로 덧붙였다. "보고 싶어요." 그동안 어머님께서 보내주신 동영상과 스승의 날에 쓴 편지 속에도 지윤이가 항상 했던 말이다. 민우에게도 "민우야, 선생님 누구야?"라고 물었더니, 민우는 내가 준 하리보 젤리를 먹으며 씨익 웃기만 했다. 그래도 그 웃음 속에서, 나는 민우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님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어머님께 답장이 왔다.
지윤이가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정유진 선생님, 보고 싶어요”라고 또 한 번 이야기했다고 한다.
내가 준 과자를 손에 쥐고 아주 행복한 미소와 함께.
"정유진, 선생님, 보고 싶어요."
이 세 마디는 그 어떤 말보다도 나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나의 존재, 나의 마음, 내가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녹아 있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