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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Sep 26. 2023

나에게 다가온 산티아고

날 위로해 줄 시간

오래전이다.

희미한 빛이 머무는 새벽이면 나는 심학산 입구에서 약천사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사람 흔적이 없는 까만 산길, 발에 걸린 자갈들이 뒤채는 달그락 소리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직 어린 자식들을 생각했다. 나는 주먹을 쥐고 발끝까지 힘을 주어 걸었다.

곁눈질로 108배를 따라 절하며 100일을 흘려보냈다. 가족을 지켜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아직 남편은 너무 젊었다. 떠나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내 사랑이었다.      

남편의 암이 재발했다. 2009년 건강검진을 통해 폐암을 진단받았지만, 초기여서 안심했었다. 수술 예후도 좋아서 한 달 만에 회사로 복귀할 만큼 회복도 빨랐다.

수술 후 4년이 지나고 다시 봄, 폐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 남편은 하루아침에 폐암 4기, 말기 암 환자가 되었다. 여러 곳에 암세포가 좁쌀처럼 퍼져있어서 수술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40대 초반의 젊은 암 환자에게 당시 폐암에 쓸 수 있는 임상실험을 마친 약은 3~4가지 정도가 전부라고 했다. 특이한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지켜보자는, 의사의 무기력한 처방을 들으며 나는 절망했다.

남편을 위해 좀 더 건강하고 좋은 먹거리를 만들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유기농 재료와 무항생제 고기를 선택했고 모든 양념은 직접 천연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한방 병원을 찾아 면역력 강화 치료에 집중했다. 남편은 8년 동안 큰 차도 없이 잘 버텨주었다.

위기는 갑자기 찾아들었다. 피할 수 없는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폐에 있는 흉수를 뺐으나 호흡이 가빠오는 상황이 되어 산소호흡기를 달았다. 몸의 정상세포는 죽이지 않고 암세포만 죽인다는 4세대 항암제는 야속하게도 남편의 몸에서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2차까지 시도했지만 암 수치는 요지부동이었다.

두 번째 항암제를 투여하면서 남편의 기력은 눈에 띄게 사그라졌다. 급기야 남편은 더 이상의 항암치료를 모두 거부했다. 연명치료 역시 절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뜻밖에도 조직검사를 해서 찾은 먹는 항암제 투약이 효과를 보였다. 약을 먹은 지 한 달이 지나자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뗄 수 있었고, 어느 정도의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2019년 봄 남편은 아직 회복되지 못했다. 뇌까지 전이된 암세포 때문에 15번의 방사선 치료를 마친 뒤에 남편은 동의를 구하듯이 내게 말했다.

“여보, 나 이제 아무것도 못 하겠어. 생각하는 것도 힘이 들고 몸의 균형도 맞추기가 어렵네.”

가족이 함께 사는 헤이리마을의 ‘물고기자리’는 남편이 구상한 건물이다. 예전처럼 회사에 복직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의 등하교를 책임졌고 자잘한 세무와 회계 업무를 도맡아 나의 일감을 덜어주었다. 투병 중에도 무엇이든 하려고 했던 사람인데, 그 입에서 못 한다는 소리가 나왔으니 그 마음은 오죽했을까?


고맙게도 아이들이 둥글게 잘 커 주었다. 남편을 쫓아다니느라 돌볼 새 없었는데 변성기를 지나 사춘기의 언덕을 넘어 훌쩍 자라 버렸다.

딸아이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되어 독립했고, 아들은 10월 9일이면 군 복무가 끝난다. 그런 아이들이 이젠 나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자처하며 날 위로한다.

“엄마, 이제 엄마도 엄마의 시간을 좀 만들어요.”

“맞아, 엄마가 하고 싶었던 걸 시작해 보세요.”

나를 위한 시간이라….

생각해 보니 바라본 적도 없이 나이를 먹었다. 일단 가족과의 공간을 벗어나야 온전한 나의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새벽 운동을 시작했다. 첫 도전은 몇 번이나 배우다 포기했던 수영이었다. 이때 만난 ‘꿀모닝’ 수영동호 회원들은 나의 영원한 새벽 운동 파트너가 되었다.

수영에 재미가 붙으니 엉뚱한 취미가 생겨버렸다. 사실 수영을 못했던 나에게 바다는 바라보는 대상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었다. 뜨거운 여름 뙤약볕에 얼굴이 타는 것도 싫었고 모래가 신발에 들어가는 것조차 꿉꿉했다. 처음 오리발을 끼고 바닷물에 몸을 맡겼을 때, 나는 파도가 아닌 해방감에 젖었다. 눌렸던 마음의 짐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다가올 많은 날을 새날처럼 새 마음으로 맞을 수 있겠다는 묘한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코로나 사태로 수영장도 바다도 막혔을 때도, 새벽 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부지런한 꿀모닝 멤버들과 수영장 대신 동네 인근의 공릉천과 살래 길을 걷기로 했다, 연중무휴, 우리는 늘 같은 시간에 만나 함께 걷는다. 답답한 생각을 내려놓고 무작정 걷는다. 걷다 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스페인하숙’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날 위로해 줄 시간, 날 위한 진짜 선물 같은 시간, 그래 바로 이거다!’

검색 끝에 랜선까미노라는 동호회를 만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사람도 걸을 사람도 함께하는 운동모임이었다. 무엇보다 매일의 운동을 기록하여 서로를 응원하는 문화가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서 만난 병환님의 책 ‘스페인 하숙보다 더 리얼한 산티아고 순례길’을 읽고 나서는 나도 어쩌면 갈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내 상황에 맞게 설계해서 가능한 일정을 맞추면 될 것 같았다. 병환님은 이미 프랑스 길(2016년, 2018년) 2번, 포르투갈 길(2017년), 북쪽 길(2019년)을 4번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이력이 있다.

그 친구와 동행하며 다음 달 21일 2주 동안 나의 큰 쉼표를 찍으러 떠난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태산인 나의 걱정들은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들과 나누고, 물고기자리는 셰프와 직원들에게 잠시 맡겨두기로 했다.

이제 모두의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그날을 준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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