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밤의 쉼표 하나
카페 문을 나서자 우리 넷은 방향을 잃어 잠깐 우왕좌왕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찰나, 길 건너 맞은편에서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안내센터 표지판을 찾았다. 한양도성 혜화동 안내센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기념행사 시에는 휴관이지만,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는 무료로 전시 관람도 할 수 있으니, 걷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쉼터가 되겠구나 싶다. 서울 한양도성 어플을 이용해도 모바일 스탬프 찍기를 다운로드할 수 있다.
한양도성 길은 백악구간, 낙산구간, 남산구간, 인왕구간으로 나누어진다. 우리는 오늘 밤 총 18.6km의 전 구간을 다 돌아보기로 했다.
첫 구간은 거리 4.7km로 난이도 상, 혜화문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백악구간이다. 한양도성은 백악(342m)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출발 시간 오후 6시 30분, 야간 트레킹인데 나 말고는 랜턴이 준비되지 않았다. 도심 속 성곽 주변으로 조명이 있으나, 출발이 늦을 때는 각자 랜턴을 준비하는 것이 안전하겠다.
비구름 가득한 밤이 시작되고 있다. 바람이 좀 불어주면 좋으련만 걷기 시작하자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땀이 비 오듯 한다. 멀 바위 안내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려니 이번에는 모기와의 전쟁이다.
흘린 땀 위로 모기들이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다. ‘모기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겠구나, 모기약도 챙겨야 했었구나’하고 늦은 후회를 했다. 숙정문 근처에 오니 어플에 첫 번째 스탬프가 찍혔다. 제일 높은 산 하나 넘었으니 이제 어려울 게 없겠는데! 기운이 난다.
창의문에 도착하자 쉬어가라는 건지, 지나는 비 한줄기 시원하게 내렸다. 단체 컷 촬영 후 “한 코스 끝났으니 시원하게 한잔 마셔 줘야죠” 하며 우리는 부암동으로 향했다. 카페 앞 빙수 사진이 눈에 띄었다. ‘내가 올해 빙수를 먹었던가?’ 삼시 세끼 말고 계절 음식을 챙기는 일도 요즘 같아서는 쉽지 않았다. 망고 빙수와 팥빙수를 하나씩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세연님이 카페 안을 요리조리 살피더니 우리에게 엽서를 두 장씩 내민다.
“이름 모를 작가가 그린 고양이 엽서예요, 선물~.”
작지만 따뜻한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행복 도파민이 몽글몽글 피었다.
빙수로 냉기 충전, 몸을 시원하게 달래고 세연님은 예정대로 발길을 돌렸다. 저녁 9시 30분 남은 세 사람은 인왕산구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인왕구간 역시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구간이다. 거리 4km, 창의문에서 시작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지나 인왕산(339m)을 넘어 돈의문 터까지 걷는 쉽지 않은 코스다. 기대 이상으로 은아님은 정말 잘 걸었다.
“어쩜 이리 잘 걸으세요?”
“제가 노인 방문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서 여기저기 안 가는 곳이 없어예.”
유난히 더웠던 여름 시골 곳곳을 다니며 어르신들 한분 한분 만나 얼마나 딸처럼 곰살맞게 했을지 다정한 말투 하나하나 그녀의 살가움이 묻었다.
인왕산 정상, 에어컨 바람과 비교할 수 없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흘린 땀으로 젖은 옷을 말릴 정도로 넉넉한 바람이다. 병환님 부부는 삿갓 바위에 앉아 탁 트인 서울야경을 바라보며, 한 여름밤 추억을 쌓고 있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부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또 부러움이 한 스푼 추가된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돌담길을 따라 도심으로 향해 내려온 돈의문 터에서 두 번째 스탬프가 찍혔다.
도심에 들어서니 바람이 사라졌다. 이화여고, 정동공원, 덕수궁, 서울시립미술관을 지나친다. 낙엽이 물드는 계절 이곳에서 마주하는 가을은 얼마나 고울까? 딸아이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아픈 아빠 덕분에 너무 일찍 어른이 된 것 같아 가끔은 속상했다. 딸아이와 가을엔 이곳에 함께 와야지. 숭례문까지 지나니 세 번째 스탬프가 찍혔다.
산을 두 개나 넘어오니 슬슬 배가 고팠다. 자정이다. 낮이라면 북새통이었을 남대문시장이지만, 고요했다. 운 좋게 불 밝힌 식당 한 곳을 찾았다. 시원한 보리차를 쭉쭉 들이켜니 살 것 같았다. 단돈 8,000원에 열무 비빔밥, 칼국수, 비빔냉면까지 3종 세트! 넘치는 주인장 인심에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난이도 중, 거리 4.2km, 이제 남산(270m) 구간으로 출발이다. 험한 구간을 넘고 나니 부담이 없다. 백범광장에서 남산(270m)을 넘어 장충체육관 뒷길로 이어지는 길이다. 배가 부르니 걸음이 무겁지만, 쉬엄쉬엄 걸었다. 백범광장,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지나 남산 팔각정, 이제 N서울타워가 코 앞이다.
보슬보슬 이슬비, 병환님이 원하던 딱 그런 새벽 비가 내렸다. 나도 이 비가 싫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병환님 부부 한걸음 뒤에서 걸어 나갔다. 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걷고 있자니, 집에서 곤히 자고 있을 남편 생각에 나도 모르는 눈물 한 방울이 툭, 비와 함께 떨어졌다. 슬쩍 눈물을 훔쳤다. 내려오는 길에서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하도 이뻐서 사진도 한 장 남겼다.
마지막은 난이도 ‘하’의 낙산(124m) 구간이다. 흥인지문에서 낙산을 지나 혜화문까지 2.1km 코스다.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밤이 더 깊어 도심을 내려오니 바람이 없고 공기도 좋지 않았다. 마지막 흥인지문을 향하는 길, 참새방앗간을 잠시 기웃거려 보기로 했다. 부부는 탄산수를 꿀꺽꿀꺽 시원하게 들이켠다. 난 달콤한 스크류바를 한입 베어 물었다.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광희문을 지나 흥인지문에 도착하니 마지막 스탬프가 찍혔다. 흥인지문 관리소에 다행히 직원이 있어 서울 한양도성 어플 스탬프를 확인하고 완주 배지를 받았다.
10월 우리는 산티아고로 출발한다. 2주 동안 걸어야 할 길은 매일 짧게는 20km 많게는 30km 정도이니, 이 정도 호흡은 맞춰 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의 출발점, 혜화문에 도착하면 끝이다. 낙산 성곽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한양도성박물관이 있다. 낮이었다면 들러서 한양도성의 이야기를 살뜰히 알아보고 갈 수 있으련만,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남겨두었다. 한양도성을 울타리 삼은 이화마을과 장수마을은 건물 외벽의 그림과 다양한 조형물을 보는 재미가 있어 정겨웠다. 성벽 길, 가톨릭대학교 뒷길로 내려오니 드디어 혜화문이 보인다.
쏟아지는 잠도, 모기와의 전쟁도 이겼다. 처음 보는 이의 깊은 맘속까지 토닥이던 은아님은 나에게 씩씩한 올리브란다. 그렇다. 나는 언제나 긍정의 아이콘,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무엇이든 힘들고 어려워도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부딪혀보는 거다.
치열한 일상을 잠시 잊었다. 쉼표 하나 찍고 나니 꿈을 꾸며 걸었다. 새벽 4시, 뚜벅뚜벅 한 여름밤 나의 걸음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