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 여름

마음을 심고 나누는 사랑

by 올리브

사랑은 때로는 아주 작고, 동그란 모양으로 다가온다.

해마다 봄이 깊어질 무렵이면, 물고기자리 옆 빈공터 한편에는 작은 농장이 생긴다. 방울토마토 모종 열 포기쯤, 고추 서너 포기와 쌈채소를 골고루 심는다. 햇살이 오래 머무는 자리를 골라 물을 주고, 바람도 맞히며 조용히 마음을 얹는다.

작년 봄, 물고기자리 옆집에 젊은 부부와 함께 아장아장 꼬마가 이사 왔다. 핑크빛 티셔츠에 청바지, 머리에는 핀을 하나 꽂고 있어, 남아인지 여아인지 헷갈릴 만큼 중성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게 오히려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꼬마는 쉽게 웃지도,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난 쉽게 마음 안 줘요'라고 말하듯 시크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어딘지 모르게 사랑이 가득해 보였다. 괜스레 눈길이 가고, 언제쯤 말을 걸까 조심스레 타이밍을 엿보았다. 그러던 여름 끝자락 어느 오후, 토마토가 한창 붉게 익어가던 계절이었다. 아이와 엄마가 산책을 나선 길에서 내가 먼저 반갑게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토마토 따러 갈래?”

아이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와 함께 방울토마토를 몇 알 땄다. 작은 손에 빨간 열매를 하나 쥐여주자 곧바로 입에 넣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예쁘던지, 괜히 나도 따라 웃게 되었다. 그날 이후, 아이는 산책길마다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토마토 따러 가요!”
그 말투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그 말 한마디면 하루가 부드럽게 풀렸다. 나는 햇살 가득 담긴 방울토마토를 아이의 조그마한 주머니에 한 줌 담아주었고, 마주칠 때마다 텃밭 데이트를 했다. 열매는 어느새 우리만의 달콤한 밀당 언어가 되었다.

아이도 직접 열매를 따고 싶어 했다. 덜 익은 초록 토마토에 손을 뻗었기에 작은 손을 살며시 잡고 말해주었다.

“이건 좀 더 기다려야 해. 자, 이 빨간 게 다 익은 거야.”
내가 손을 얹어준 붉은 열매꼭지를 똑하고 따더니 입에 넣고 말한다.

“음~ 달콤해!”
세 돌이 채 되지 않았는데 색깔을 알고, 달콤하다는 표현도 알고, 심지어 이렇게 물어오기도 했다.
“이모는... 농부야?”

아이의 눈망울은 투명했고, 그 말속에는 “저도 이모랑 친해지고 싶어요” 하는 속마음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작고 귀여운 친구가 나를 찾아올 때마다 환한 게 웃어주니 나도 덩달아 마음 한 자락을 꺼내어 전하게 된다. 매번 '이건 사랑이야'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토마토를 따는 날이면 괜히 마음이 아릿해진다. 아이들이 어릴 적, 늘 아침마다 정신없이 출근하느라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뭘 잘 먹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렀고,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그 시절, 친정엄마께서 두 손자들을 품에 안고 애지중지 돌봐주셨다. 아마도 갱년기를 견디던 때였고, 몸이 아프신 할머니까지 챙기며 본인 삶은 늘 뒷전이셨다. 지금 돌아보니 나는 엄마께도 아이들에게도 사랑하는 마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이웃집 작은 꼬맹이가 토마토를 입에 넣고 웃을 때면 마음 어딘가가 스르르 풀린다. 괜히 나도 모르게 웃게 되고, 그 웃음 사이로 오래 묵은 감정들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아마 나는 지금 그때 미처 누리지 못했던 시간을 천천히 곁에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작은 농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물도 주고, 곁가지도 정리하고, 그리고 열매가 익어갈 때쯤 다가올 작고 따뜻한 손을 기다린다.
그 손안에 내 마음을 살며시 담아줄 생각을 하며

곧 빨갛게 익을 열매들 (사진 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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