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핑크

by inner courage

외래진료실에 들어가니 선물상자가 놓여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박하지만 정갈한 선물상자이다. 뚜껑을 열어보니 연한 핑크색 털 목도리가 곱게 접혀있다. 손가락사이로 보드라운 털이 느껴진다. 기분이 몽실몽실하다가 코끝이 매워졌다.


F는 담낭암 환자이다. 진단 당시부터 여러 곳에 전이가 있어 수술은 하지 못했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담낭암을 포함한 담도계 암은 예후가 좋지 않은 암종으로 잘 알려져있다. 전이가 있는 경우, 항암치료를 하더라도 평균 생존기간이 1년 남짓이다. F의 경우 암세포의 성격 또한 매우 공격적이라서 더 나쁜 예후가 예상되었다.


직접 만난 F는 에너지가 넘쳤다. 화려한 메이크업을 좋아했고 악세서리도 크고 블링블링 했다. 다부진 체격에 목소리도 시원시원했다. 기분이 좋을 때 흥얼거리는 노래 솜씨는 수준 급이었다. 전국노래자랑에서 보았던 흥이 넘치는 어머니들 같았다. 암세포의 성격 때문에 강한 항암제를 선택했지만 잘 버텨주었고 효과도 좋았다. 회진 때마다 그의 병실에 들어서면 넘치는 흥으로 나까지 어깨가 들썩였다.


4개월이 지나자 항암 부작용으로 손발이 저리기 시작했다. 5-6개월이 지나자 더 심해져 물건을 놓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쉬는 법이 없었다. 다른 환자들과 이야기하고 등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8개월이 지나자 병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통증도 다시 생겼다. 약제를 바꾸고 방사선치료도 했지만 암은 물러서지 않았다. 또다시 약제를 바꾸고 치료를 시작했다. 그 사이 그는 많이 지쳤고 다부지던 체격도 왜소해졌다. 흥얼거리던 노랫소리도 뜸했다.


그때 쯤 그는 뜨개질을 시작했다. 아프고 저린 손으로 몇 땀 뜨고 쉬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완성된 목도리가 나에게 왔다.


평소 무채색 옷만 입는 나는 핑크색이 어색하다. 출근하려고 옷을 입고 거울을 보니 온통 컴컴하다. 그냥 나가려다가 핑크색 목도리을 슬쩍 둘러보았다. 보드라운 털이 목과 얼굴을 감싼다. 거울을 보니 좀 환해 진 듯하다. 떨리는 F의 손길이 느껴진다. 올 겨울은 핑크 목도리와 함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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