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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KANG Feb 17. 2024

넣어준다고?

#24

20년 전 이야기입니다.


S가 소주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목소리에 뭔가 답답한 짜증이 섞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S가 다니는 단골 바(Bar)로 갔더니 이미 한잔을 하고 있더군요.

S는 아끼는 고등학교 후배였고 대학 동문 골프 모임에서 일어난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말 S와 동기 T, 3년 후배 A가 새로 가입한 1년 후배 P의 환영식을 겸한 번개 라운드를 했다고 합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였겠지만 모두 잘 나가는 전문직이었고 합니다. 

즐거운 라운드를 마친 후 맛집에서 식사를 했고, 신입 P가 열렬한 환영에 대한 보답으로 식사비를 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후배에게 밥을 얻어먹은 S가 그날 라운드 후기를 게시판에 올렸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S가 올린 후기의 마지막 줄에 있는 한 단어였습니다. 

"P. 오늘 너무 잘 먹었어, 다음에는 내가 더 맛있는 걸 넣어줄게."


저도 S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넣어준다'라는 단어가 특이하다고 느꼈습니다. 왜 그 단어를 선택했는지 물었습니다.

"넣어준다? 왜 그 단어를 쓴 거야?"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S가 말했습니다.

"그냥 밥 사줄 게는 조금 심심한 거 같아서 뭐 딴 단어가 없나 하다가 넣어줄 게가 재미있을 거 같아서 썼죠."

"근데 그게 얼마나 큰 문제가 됐길래 나까지 찾아온 거지?"

"갑자기 동문회에서 윤리부장 같은 역할을 하는 선배가 전화가 오더니 문제가 심각하다는 거예요. P가 성적인 수치심을 느꼈다고요."

"정말? 그럼 혹시 그날 라운드하거나 밥 먹으면서 P에게 어떤 시그널을 준거 아냐?"

"아유~! 형. P는 정말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형! 제 여자친구 아시잖아요."

"하긴, 너 여자 친구가 정말 아름답지. 그럼 뭐지? 그건 그렇고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전, 정말 그런 의미도 없었고 또 제가 그동안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봐도 그렇고, 다른 여자 동문들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제가 만약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P와 단둘이 있을 때 무슨 작업을 해도 하죠. 게시판에 그런 식으로 올리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그러게. 네가 그렇게 무식한 사람이 아닌데. 여자 친구랑 지금 한창 뜨거운데 말이야. 여자를 한두 명 사귀어 본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P가 난리를 쳤나 봐요. 자기를 성적인 대상으로 삼았다고요. 그런데 더 웃긴 건 그 윤리부장 같은 선배였어요. 저보고 정식으로 사과를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저를 아는 선배들에게 전화를 돌렸죠. 전 정말 그런 생각 하나도 없었다고요. 잘 아시지 않냐고요."


그날 S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마셨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참 별 것도 아닌데... 물론 P가 느꼈다면 느낀 거고 그걸 작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동문골프모임의 게시판에 올라온 단 하나의 단어로... 그것도 폭력적이거나 SEX자체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단어가 아닌데 S가 겪어야 했던 상황이 조금 어이가 없었습니다.


몇 년이 흐른 후 S를 다시 만났습니다. S는 여전히 동문 골프 모임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골프 이야기를 하다 '넣어줄게'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결국 S는 게시판에 사과의 글을 올렸고 P가 대강 넘어가 주는 방식으로 마무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이후 P와는 아무래도 껄끄러웠을 것 같아 궁금했습니다.

"S. 그때, P 있잖아. 넣어줄게 그 P. 그 친구와는 어떻게 지내?"

"P요? 뭐 그때 이후 알아서 서로 피했죠."

갑자기 S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나갔어요."

"나가? 왜? 너 때문에?"

이번에는 S가 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저요? 아니요. 대신 다른 일이 있었어요. 저도 들은 이야기예요. 뭐 제가 P일을 어떻게 자세히 알겠어요. 근데 P, 얼마 안 가 이혼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때 P의 편을 정말 열심히 들어주던 동기가 한 명 있었거든요. 그 친구도 이혼을 했고요."

S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하하... 근데 그 동기랑 P가 사귄다는 소문이 동호회에 퍼졌었거든요... 수근덕 거리기는 해도 아무도 아는 체를 안 했지만요." 

S가 웃느라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단어 하나 가지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P와 동기가 모임을 통해 만나며 열열한 연애를 한 건 팩트(fact)가 되었고 결혼을 할 거란 이야기까지만 들었다고 S가 말했습니다. 

https://youtu.be/rGpVbVYMvds

참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S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S는 어떤 느낌이 드니?"

"저요? 묘하죠! 그때 억울한 거 생각하며 정말~!!! 근데 둘이 사랑을 한다면 잘 되길 바라요. 어찌 보면 정말 뜨겁고 진실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사랑이었을 거잖아요."


S는 그때 그 일 덕분에 동문골프 모임을 조금 떨어져 다시 한번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게 중심을 모임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두기 시작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S도 동문골프모임을 그만두었습니다.

S가 동문 골프 모임을 그만두고 난 후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형, 사실 저 그때 그만 두려 했었어요. 그런데 그럼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근데 이젠 다 소용없다는 걸 알았어요. 모임이 뭐라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려 노력을 해야 해요. 그냥 그런 사람이 되면 그만인 걸. 그리고 그때 알았어요. 결국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친한 사람>은 언제든 다수의 편에 선다는 걸요. 어쩌면 그게 생존본능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젠 누군가 나를 왜곡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난 그런 사람과는 인연을 유지하려 노력하지 않을 거예요."


S의 이야기를 들으며... S와 P, 그리고 그 동기.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쩌면 사람이라면, 돌을 던지기도 하고 한편 돌팔매질을 당해야 하는 시간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을 던지는 사람의 한없이 순결하고 부끄러움 없는 마음을 떠 올려 봅니다.

돌을 맞는 사람의 더럽고 부끄러움 많은 마음도 떠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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