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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KANG Jun 21. 2024

하루키의 소설, 나(self)의 골프

안녕하세요. 

류캉입니다.


골퍼라면 매번의 골프가 다르다는 동감하실 겁니다. 스코어도 다르고 스윙도 다르고 느끼는 감정도 다르고... 그런데 느닷없이 가끔, 골프를 쳤다는 느낌이 때가 있습니다. 운이 유달리 좋거나 버디를 양산해서 드는 기분과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뭔가를 잘하거나 못해서 드는 마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체가 없어 아득한데 그득한 그런 묘한 느낌입니다. 


하루키의 에세이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78년 4월 잔디 언덕으로 조성된 야구장 외야석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는데 타자가 휘두른 방망이에 야구공이 맞은 상쾌한 소리가 구장을 울릴 때 하늘에서 뭔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하루키가 그걸 두 손으로 받아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루키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왜 그때였는지의 이유도 여전히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것이 일어났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하루키는 본질의 돌연한 현현(顯現), 직감적인 진실을 뜻하는 단어인 epiphany라는 단어로 그 순간을 설명합니다. 그날 야구 경기가 끝나고 하루키는 원고지와 만년필을 샀고 밤늦게 가게일을 끝내고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아! 나는 살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한들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살갗에 전류가 흐르거나 도파민 소나기에 뇌세포가 젖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 것입니다. 수면마취를 하고 위 내시경을 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몽롱해짐을 느끼는 순간 의식은 사라집니다. 그 순간은 너무 짧아 어떤 생각도 또렷하게 머물 수가 없고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흐려지는 의식을 막거나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평소 죽음의 순간도 수면마취의 순간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구체적인 생각이 가장 절실하고 뭔가 커다란 생각의 획을 긋거나 규정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의 느낌. 어떤 사람은 암담해할 것이고, 안타까워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빠질 틈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짧은 시간일테니까요.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으니 상상일 뿐이지만 언제인가부터 생명의 경계선은 무척 가늘고 흐리다 못해 투명할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6월이 아직도 많이 남았지만 30도가 이어지는 예년과는 확실히 달라진 한반도. 더위를 피해 세이지우드 홍천으로 향했습니다. 1박 2일, 36홀. 첫날 비전으로 시작해 챌린지로 마쳤습니다. 그 에어레이션이 늦어져서 인지 아직도 2주는 더 있어야 정상이 될 것 같은 그린 때문에 높았던 기대는 추락했고 최소한의 만족을 찾아 마음 밑바닥을 더듬어야 했던 라운드였습니다. 라운드를 마치고 나니 극심한 안개로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 못했던 지난번 라운드에 이어 뭔가 허탈해지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날 드림코스로 출발. 마침 노캐디 라운드라 마음이 더 편해서였는지 첫 홀부터 마음이 흡족합니다. 역시 잔디만큼 모래알갱이가 고르게 퍼져있는 평소라면 한마디 하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런 그린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전날 마음에 썩 흔쾌하지 않았던 캐디의 반복에서 벗어난 안도감을 말하는 동반자와의 대화로 서로를 위로하며 라운드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첫 홀 티박스에서부터 어제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고 두번째 홀부터는 뭔가 많은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3번홀로 들어서며 골프가 나인지 내가 골프인지 모르는 모호함에 빠졌습니다. 하늘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는 '어떤'것을 잡았던 하루키처럼 전반을 마쳤습니다. 


이젠 모르거나 느껴보지 못한 게 없을 것 같은 골프에서 이유를 몰라야 더 뿌듯하고 만족하는 경험. 결과가 모든 걸 가져가는 세상살이에서는 가질 수 없는 경험을 오랜만에 또 느낀 날이었습니다. 이유가 분명하길 바라지만 이유가 없어도 괜찮을 때 아니 오히려 삶이 진해지는 경험을 할 때 삶과 골프의 아이러니는 가슴속에서 파르르 진동합니다. 


저는 홀의 디자인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로 자연스러운 집중을 꼽습니다. 모든 홀들은 각기 다른 기술적 난이도와 서정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본능을 자극하는 직관이 각자 자기의 역할을 하며 집중을 이끌어 냅니다. 코스 설계자에 따라 배합의 비율과 강도를 조절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 냅니다. 드림 코스를 플레이하며 만족했고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보람까지 느꼈습니다. 뭐랄까요 뭔가 퓨어(pure)한 존재가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만족과 보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후회처럼 버려야 할 생각 없이 본능적인 집중의 시간을 보냈을 때 느끼는 퓨어(pure)한 나 자신. 제가 추구하는 골프의 궁극적 목적과 상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세이지우드 홍천을 또 간다면 드림코스(9홀) 때문일 겁니다. 챌린지와 비전도 잭니클라우스 설계 코스답게 홀과 그린의 공략 방법이 선명하지만 드림코스에 비교하면 단순합니다. 9홀 기준으로 국내 최고의 9홀 코스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높은 난도, 하나 이상의 전략을 허용하는 공략법, 토포그라피(topography)의 다양성, 성취와 좌절을 모두 느낄 수 있는 드문 코스로 느꼈습니다. 세이지우드 홍천의 드림코스는 자연스러운 집중으로 시간이 길고 두껍게 느껴지지만 정작 9홀을 끝내고 나면 찰나처럼 지나간 시간의 속도를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코스였습니다. 만약 도전적인 코스를 즐기고 싶고 탄도 높은 페이드가 가능한 실력자라면 드림코스 블루티에서의 플레이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세이지우드 홍천은 일반적인 프리미엄 골프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루 숙박비 100만 원, 평일 기준 그린피 27만 원(물론 시즌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지만요.), 카트피 12만 원, 아침 서양조식 3만 2천 원 등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고립된 강원도 산골에 위치한 골프장 치고는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더구나 회원제도 아닌데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산관리회사에 일정금액 이상을 위탁한 분들에게 다양한 무료이용 쿠폰이 지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후 이해했습니다. 자산운용사의 프리미엄 고객 대상 영업을 위한 골프장의 역할이 어쩌면 세이지우드 홍천의 탄생이유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시설은 물론 이용요금도 넘사벽이 돼야 영업 효과는 더 커질 것 같습니다.


세이즈 우드 홍천은 그런 무료이용 쿠폰이나 무료 라운드등의 혜택을 공유하며 간다면 꽤 가볼 만한 골프장입니다. 저는 드림코스에서의 훌륭한 경험이 있음에도 그런 혜택이 없다면 다시 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데 저만 제 값을 내야 하는 상황이 마치 36년 전 미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느껴야만 했던 유색인종으로서 차별을 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너무 모든 게 '고급 고급'하는 곳에서도 너무 모든 사람의 자산이 느껴지는 곳에서도 저는 그다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골프를 통해 더욱 또렷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루키는 그때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그 순간의 '설명할 수 없음'을 소설에 담고 싶어 할지 모른다는 상상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때 마음을 반복적으로 느끼기 위해 소설을 쓰는지도 모른다는 억측도 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저도 골프를 하고 싶어졌던 순간의 '설명할 수 없음'을 담고 싶어 골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 그때 느꼈던 마음을 찾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열정으로 골프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태어났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삶이지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벅찬 삶. 참 삶은 언제나 너무 행복하기 쉬운 녀석입니다.


https://youtu.be/QS721-Jq-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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