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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는 뛰지 않는 게 좋다

숨 가쁜 르완다 살이

by 오즈



르완다엔 별명이 있다.

천 개의 언덕.



별명처럼 언덕이 많고

길도 굽이굽이 이어진다.


그리고 여긴 전반적으로 높다.


평균 해발 1,598m,

가장 낮은 곳조차 950m나 된다.



숫자만 보면 얼마나 높은지 잘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ChatGPT에 질문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르완다에서 생활하는 건, 한라산 중턱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한라산 중턱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한라산에 가본 적이 없는데

나는 아프리카까지 와서 한라산 중턱의 어느 휴게소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머무는 셈이다.







고산지대에 산다는 걸 몸으로 실감한 건

르완다에 도착한 첫 주였다.



첫날 밤,

코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코끝에 손을 대보니

묽고 뜨거운 액체가 묻어났다.


코피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코피가 잦은 편이었다.

큰 효과는 없었지만 코를 지지기도 했고

이비인후과 선생님이 자꾸 코를 후비는 거 아니냐고

캐물어서 예민하던 소녀시절 (아마 11살 추정)

짜증났던 기억도 생생하다.

(아니다, 정말 아니다.)



어쨌든 나는 코피 단련자였기에

그 밤에도 조용히 휴지를 꺼내 처리했다.

하얀 침대 시트에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아주 능숙하게.



처음엔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비행 시간만 17시간이었다.

그 정도면 코피 한 번쯤 날 만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다음 날도, 하루 걸러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코피가 나는 것이 아닌가.

열흘 동안 다섯 번의 코피.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게 코피 사진을 보여주는 건 처음이다. 귀여운 것만 엄선




검색해보니 이건 경미한 고산병의 일종이었다.

보통 고산병은 해발 3,000m 이상의 산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하지만

나무위키가 친절하게 일러주길ㅡ

고도가 높으면 콧구멍이 건조해 콧속이 트고

코피가 자주 날 수 있다고 한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코피를 달고 살았어도

하루 걸러 하루 코피를 쏟을 만큼 허약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건 고산증세가 분명하다.

그럼그럼.



다행히도 아프리카 가는 조카 걱정에 약을 바리바리

마흔 개쯤 싸주신 이모 덕분에 안연고가 있었다.


요즘은 자기 전에 콧구멍 안쪽에 연고를

살짝 발라주는 것으로 코피를 예방하고 있다.



이모 사랑해요



고산 지대에서 살고 있음을 뼈져리게 실감하는 순간은 러닝할 때다.



한국에선 러닝을 즐겨하진 않았다.

해봤자 러닝머신 위에서 유튜브를 틀어두고,

반복되는 풍경을 보며 억지로 몇 분 뛰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곳에 오니 이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안개 낀 아침 공기, 겹겹이 쌓인 언덕들,

햇빛을 머금은 나뭇잎까지.

한 번쯤 뛰어보고 싶어 러닝을 시도했는데

생각보다 상쾌하고 좋아 어느새 주 2회 정도 달리고 있다.



그런데,

정말 힘들다.

아니 힘들어 죽을 것 같다.



리얼 러닝



길지 않은 코스에 가벼운 속도로 뛰는데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심박수가 순식간에 180까지 치솟는다.






한국에서 뛸 때와는 전혀 다르다.

분명 느린 속도인데도 숨이 가빠오고 몸의 한계를 느낀다.



그런데 또 신기한 건 뛰다가 멈추면 심박수가

놀라울 만큼 빠르게 내려간다는 것.

조금 전까지 터질 듯 뛰던 심장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진다.


이것도 고산의 특징 중 하나인가 싶어 검색해봤다.

실제로 고산 지대에서는 같은 운동을 해도 공기 중의

산소 농도가 낮아 더 많은 심박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멈추면 산소 소비량이 줄어들어

평지보다 심박수가 급격히 내려가는 경향이 있다고.



이론보다 실전으로 먼저,

오늘도 몸으로 배우는 르완다 살이다.



러닝하며 만나는 소, 돼지보다 비싼 닭들



이제 이곳 르완다에 온 지도 어느덧 20일 차.

여전히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오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각이 낯설지 않다.

처음처럼 당황스럽지도,

멈춰 서서 한동안 숨을 고를 만큼 힘겹지도 않다.



처음 러닝을 했을 땐 폐에 작은 구멍이라도 생긴 것처럼

숨을 아무리 깊게 들이마셔도 한 모금 부족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처럼 숨이 급하지도 않고

빠르게 뛴다 해도 그 박동이 예전만큼 버겁지도 않다.



적응이라는 건 결국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몸이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숨이 차오를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달려보는 것.




러닝하며 만나는 고릴라 그라피티



계단 몇 개만 올라도 숨이 턱 막히던 첫날과 달리

이제는 러닝을 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체력이 붙는 게 단지 몸의 변화만은 아닌 것 같다.

이 낯선 땅을 혼자 살아가는 데에도

비슷한 종류의 근육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최애 러닝 코스. 수도이지만 여전히 비포장 도로도 많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게 되면 내 몸은

이 공기에 적응했던 그 감각을 기억할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릴까.


지금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주 일상적인 어떤 순간에

문득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마치 지금처럼.



어쨌든, 오늘은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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