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레드릭 Sep 24. 2021

꿈의 좌절로 방황하던 8등급 고2

수업 시간마다 엎어져서 잠만 자던 학생, 수민이.

전교생의 교과서 분류와 30개 반 학생들의 배부를 도울 도우미를 뽑을 때 선뜻, 매우 의욕적으로 나서서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봉사활동 시간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한 봉사(즉, 무보수 육체노동)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30개 반 전교생의 교과서를 국정교과서와 검정교과서 따로 배달을 받아서 배달 수량을 정확히 확인하고, 반별 대표 학생 10명에게 배분할 때 수령하기 가장 편하고 효율적인 동선을 고려하여 선택과목별 교과서와 의무 과목 교과서를 배치한 후 반별 교과서 신청 목록표를 보고 1권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인계를 해야 하는 일이다. 전체적인 지휘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학생 개인별 교과서 신청 목록표를 한참 보면서 과목별 교과서 권수, 공간배치, 배분 경로 등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민이가 자기가 좀 보겠다고 신청 목록표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단박에 결론을 냈다. “선택과목 중에 윤리가 가장 적으니까 입구 쪽 처음에 놓고 그다음 많은 세계사, 그다음 많은 한국지리, 그다음 많은 … 의무 과목은 출구 쪽에 놓으면 돼요. 반별로 배부할 때 선택과목 섞여 있는 2학년 3, 4, 5, 6반만 저희가 따로 안내하면 되고, 3학년 앞반과 뒷반은 영어교과서 다른 거 확인해주고, 1학년은 다 공통이니까 11개 권수만 확인하면 돼요.” 하더니 다른 아이들에게 목록표 보여주면서 설명하고 교과서 박스 배치를 시작했다.


문과인 나는 숫자 가득한 표를 보고 어질어질했는데 수민이는 개별, 전체 통계가 한눈에 들어오는 탁월한 수학적 머리를 가진 게 분명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설명할 때 잘 이해하지 못하면 통계표를 보여주면서 요약해주고 업무를 지휘하면서 진행하는 추진력에서 나는 수민이의 잠재력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교과서 배부하는 내내 반별로 과목별 권수를 정확하게 확인하면서 남은 권수도 체크하여 잘못 가져간 반에 가서 가져오고 가져다주면서 예정된 시간 내에 30개 반에 한 권의 오류도 없이 교과서를 배분하였다. 교과서는 나중에 잘못 가져간 학생이 생기면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모른다. 담임교사가 학생의 신청서를 취합하고 그 수량에 맞춰 교과서 주문 수량이 들어갔고 예산이 집행되어 결재가 완료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 어딘가에서 오류가 생겼다는 뜻이다. 담임교사가 입력을 잘못했을 가능성, 취합자가 주문 수량을 잘못 계산했을 가능성, 교과서 회사에서 배달된 교과서 부수가 틀렸을 가능성, 배부 날 학생에게 배달이 잘못되었을 가능성. 이 모든 가능성을 다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교과서 배부 날 학생 한 명 한 명의 신청 교과서를 확인시키고 정확하게 배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특하고 고마워서 치킨 파티를 했다. 치킨 파티를 하면서 영어 수업시간과는 180° 다른 수민이 모습 궁금해서 영어시간에는 왜 잠만 자는지 물어봤더니 부모님이 체육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 자기 꿈인 체육교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무슨 오해가 있겠지...

자식이 체육교사하는 걸 반대할 부모는 없을 텐데.

꿈의 좌절로 학업 의욕을 상실한 사실을 확인하고 어머니께 편지로 학생의 잠재력과 체육교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알려드린 후 직접 만나 뵙고 체육을 하겠다는 것이 공부를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오해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체육교사의 꿈을 허락받은 날로 수민이는 완전히 달라졌다.

갑자기 어느 날, 처음 보는 학생이 맨 앞줄에 앉아서 초롱초롱 눈으로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집중 열공하는 것을 목격한 많은 교과 선생님들은 의아해했다. 저 학생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도대체 누구인지. 교무실 선생님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우리 수민이 잘 좀 부탁드려요. 체교과에 꼭 가야 돼요. 체육선생님 될 거예요.”     

학급과 주변에 학업적 성취에 관심 있는 친구가 없어서 동기부여를 위해 내가 다니던 EBS 영어 스터디에 데려가서 학구적 자극을 주었다. 그 스터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 진행하고 대부분 멤버가 직장인이라서 고등학교 2학년을 데려가면 한 몸에 주목을 받을 것이고 영어 잘한다는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영어로 대화를 하면 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지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스터디 멤버들은 수민이를 보고 환호성을 질러 환영했다. 모두 수민이를 많이 아껴 주셨지만 영국 명문대 졸업한 오픽 영어강사분과 곧 워싱턴대학으로 유학을 떠날 분이 특히 수민이를 아껴주셨다. 워싱턴 유학생은 미국에서 수능 전날 격려 전화를 해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여줬다. 떠듬떠듬 몇 마디씩 영어를 하면서 스터디에 집중하는 모습은 신세계를 경험하는 참신함 그 자체였다. 스터디에서 의외로 활약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 동기부여받고 1박 2일 MT도 참석했다. 주말에 수민이를 강남 스터디 장소까지 태우고 다니면서 학구적 에너지를 공급했다.     


한 번은 스터디에서 이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깜빡 졸았는지 눈을 감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대로 황천길 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어머니께 문자를 보내고 차 안에서 1시간쯤 자고 밤늦게 돌아왔다. 매일 아침 0교시 보충수업, 저녁 보충수업은 기본이고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시절이라 학교 일 끝난 나머지 시간에 아들과 열심히 놀아주기에도 시간과 체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내 아들을 잘 챙기기도 부족한데 제자를 챙기는 게 맞는 건가 고민도 많았지만, 잠재력이 반짝하는 그 순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스터디에 5살 아들도 같이 데려가서 깍두기처럼 우리 사이에 끼어서 책 읽고 그림도 그리고 같이 놀았다. 수민이는 아들이 많이 걸어서 힘들어하면 나 대신 업어주기도 하고 계단 올라갈 때 목마도 태워주고 차에 태울 때 번쩍 들어서 재미있게 해 주었다. 아들은 형이 생겼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형이 집에 놀러 오면 이리저리 팔 붙잡고 데리고 다니면서 소개해주고 피아노도 쳐주고 맛있는 것도 만들어 준다고 하고 신이 나서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혼자라서 외로워했는데 든든한 형이 생겨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수민이 부모님은 텃밭에서 손수 야채와 과일을 키우셨는데 아들이랑 텃밭 구경 가서 싱싱한 수박을 선물 받았다. 학생에게 절대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이 내 철칙인데 수민이 어머님이 아들이 예뻐서 그런 다시며 수박 먹어보렴~ 하시며 아들에게 내미셨다.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왔다. 직접 키워서 그런지 크기가 작지만 수박 육즙이 입안에서 싱그럽게 퍼지는 건강하게 맛이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땀 흘려 키우신 귀한 수박.     


체대 입시반.

입시반 교사가 동갑이어서 친한 사이라 수민이 체교과 가능성에 대해 솔직하게 물어봤다. 고2말 8등급이 체육교육과를 들어가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다. 레저스포츠과나 스포츠학과는 몰라도 사범대는 불가능이라고 단언했다. 게다가 체육 실기가 뛰어난 스타일이 아니라면서 실기 신이라도 못 갈 형편인데 절대 안 된다고... 수민이는 키가 180cm가 넘고 덩치가 큰 편이라 운동신경을 타고난 날렵한 체형은 아니었다. 근육은 좀 키울 수 있어도 체대 실기시험인 10미터 왕복 달리기, 제자리멀리뛰기, 좌전굴, 서전트 같은 종목에서 유리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천고 체대 입시반 기초체력훈련은 교문에서 체육관까지 이르는 오르막길을 달리고, 점프로 뛰고, 앉은뱅이 자세로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주로 점심시간, 5시 퇴근시간에 이루어졌다. 한 번은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을 돌다가 수민이를 마주쳤는데 나의 반가운 인사에 아무 대답도, 표정도 없이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데 나중에 수민이가 죄송하다면서 설명을 했다. 체대 훈련을 하면 입 안에 침이 바짝 말라서 말소리가 안 나오고 표정 지을 힘도 없다고. 늦게 시작했으니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 더 힘들었을 것이다.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걸 보니 내적 동기에서 발현한 ‘꿈’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MRI

수능까지 공부할 건 많고 시간은 없고 마음이 급해진 수민이는 잠자는데 쓸 시간이 없었다. 하루 3시간 수면으로 공부한 지 한 달이 되자 깨질 것 같은 두통으로 병원을 찾았고 MRI를 찍었는데 갑자기 공부를 많이 해서 뇌가 놀란 것 같다고 하셨다. 안 자고 공부하면 당장은 많은 시간을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닌 과정이기 때문에 뇌가 쉬기 위해 이상 신체 반응을 보이거나 뇌 작동을 멈춰서 공부가 전혀 안 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평소에 충분한 수면을 하면서 공부하는 양보다 적은 양을 공부하는 결과가 된다.     

4개월 만에 수학 2등급, 국어 5등급

고2 겨울방학 열공 후 고3 첫 시험 수학 2등급, 국어 5등급.

수학 머리가 있을 거라고 예측했지만 이 정도로 획기적일 줄은 몰랐다. 그 당시 대부분 체대의 입시는 수학 과목을 필수로 요구했었고 수민이에게 약한 영어과목은 반영하지 않았다. 국어와 수학이 이 정도로만 나와준다면 체교과도 가능하다.

하루는 현재 체육 임용고시에 뽑는 인원이 너무 적은데, 자신이 체교과 가더라도 임용시험에서 체육을 뽑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수민이가 물었다. 그해 경기도 체육교사 임용인원이 5명 정도였으니 걱정할 만했다. “지금 적게 뽑으면 수민이 졸업할 때는 엄청 뽑으니까 걱정 마. 교원 수급도 업다운이 있거든. 그래프처럼 오르락내리락.” 근거가 뚜렷하지 않았던 나만의 확신이었는데 수민이가 체교과 졸업할 때 진짜로 체육교사 임용인원은 80명으로 늘었다. 수민이 수능시험날 부모님 두 분 다 출근하셔서 내가 수능시험장까지 바래다주고 차에서 내리기 전 손목에 손수건을 묶어 주면서 행운을 듬뿍 주는 손수건이니까 긴장해서 실수 좀 해도 괜찮을 거라고 격려했다. 획기적인 성적 향상과 무탈한 실기시험을 치르고 수민이는 서원대 체육교육과에 합격했다. 대학에 가서도 체육에 대한 열정으로 과대표가 되어 교수님의 논문을 보조하고 서원대 체육관 열쇠를 맡아서 체육관 청소로 매일 아침을 시작하고 체육관 관리를 맡을 만큼 적극적인 대학생활을 했다.     


임용고시 합격

중학교 체육교사 이수민.

수민이는 대학교 들어가서 배구에 빠져서 대학팀 배구시합에서 우승을 할 만큼 실력이 좋았다. 당시는 배구가 대중적이지 않고 생소하던 때라서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수민이가 임용고시 면접을 치를 때 배구 전공 시험관이 관심 있게 배구 질문을 던져서 배구를 했던 것이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임용고시 필기시험 중에는 운동량, 체지방을 계산하는 과목이 있는데 수학을 잘하는 수민이에게 이 또한 상당히 유리했다고 했다.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체육선생님이 되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중학교 체육교사로 발령받은 수민이는 체육과목과 담임반 아이들의 상담에 온 열정을 다하고 특히 부적응 학생(사고를 치는 아이들) 지도에 발 벗고 나서서 생활지도를 하고 있다.


-학생 이름은 가명을 사용함.

이전 02화 대한민국 스승상 - 녹조근정훈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