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오패스 사용설명서 - 22화

오영오

by 주원

사회생활을 할 때 내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중 가장 높을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지속성이다. 성실함과 비슷할 수 있지만 약간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 항상 일찍 나오고 늦게 퇴근하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해서 꼭 맡은 일을 꾸준하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실한 사람이 계속해서 이상한 업무 기획을 해대며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지 않은 채 광만 팔아대며 생산성을 떨어트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하다. 성실하게 자기 할 일만 하는 사람보다, 조금 성실하지 않더라도 하기 싫은 부분까지 억지로 하는 끈기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가르침에 더 부합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중학생 소녀들의 교환일기와 비슷한 수준의 에세이를 일 년째 끝내지 못하는 주원이의 성실도와 끈기를 통해 인간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

소시오패스 사용설명서는 3부작으로 기획되어 있다. 3부는 회사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그때 다시 등장할 수 있지만 얼마 전에 내 업무의 서브로 들어온 현진하라는 신입사원이 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갔지만 예전 실장이었던 꽉 막힌 어르신이 학력과 학점만을 보고 뽑았다고 들었는데, 한동안 다양한 인재를 뽑는다며 학력보다는 개성을 보고 뽑은 폐급들과는 다르게 빠르게 업무 적응을 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입시까지 공부하는 것도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는데, 대학교까지 가서 학점을 잘 받았다는 것은 바로 성실하다는 것. 회사에 들어오기 쉬운 시절에 운 좋게 들어와서 입으로만 일하는 쓰레기 같은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고 잘 성장하길 바랄 뿐이다. (주원의 학점은 2점대이다)


수사관과 질의응답은 어느덧 네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우리의 모든 대화를 듣고 있진 않았겠지만 검사도 라디오 경청하듯 모든 대화를 들으며 자기 업무를 하고있었다. 수사관이 궁금한 걸 다 물어본 후, 잠시 후 나랑 영오가 검사와 면담시간을 가질 거라 하며 사무실을 나갔다가 10분 뒤에 돌아오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와 둘이 있기가 무서운 듯, 영오는 경보하듯 사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앞선 화에 말했듯이 검찰청 내부가 너무 넓어 10분 안에 갈 곳이 없을 것 같아 밖에 나갈 생각을 안하고 정수기 옆에 비치된 카누 라떼를 타고 있었는데, 수사관이 사무실 밖에서 있다가 돌아오라고 떼를 써서 쫓겨나듯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 나가자마자 5센치 옆에 벤치가 있길래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수사관이 검사에게 우리와 나누었던 대화를 브리핑하고 있었다.


브리핑 내용 중에는, 영오가 오늘 수사에 임하기 전, 수사관이 영오 친구들을 소환해서 한차례 질의응답을 했던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나에게는 틱틱거리며 어차피 패소할 것인데 공권력 낭비라고 까칠하게 굴던 아저씨가 나름 안 보이는 곳에서 영오 친구들까지 불러서 조사를 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영오 친구들이 진술한 내용이 영오의 주장과 다르며, 오히려 주원이의 진술과 일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영오의 친구들답게 의리라고는 쥐뿔도 없는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나와 영오를 부르려고 수사관 아저씨가 문밖으로 나왔는데, 문 바로 옆에 있던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아니 여기 계셨어요? 대화 내용 다 들었어요?"


"네 어디 갈대 없어서 여기 있었는데요? 검사님은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렸는데 수사관님이 말한건 다 들었어요."


수사관이 한숨을 연거푸 쉬면서 모라모라 징징거리길래 다음부터 인터미션 시간엔 사무실 문을 닫아두는 습관을 키우라고 했다.


참고로 영오는 사무실 근처 시야에도 보이지 않아 몇분 더 기다리다가 사무관이 전화했더니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고 그로인해 한차례 더 꾸중을 들었다. 그 당시 나이가 33살 정도였던것 같은데, 성인인것 치고 혼나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검사는 나와 영오를 앉혀놓고 수사관이 브리핑 한 내용을 불러주며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한 5분정도 소요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영오에게 한 질문이 인상깊었다. 정확힌 기억 안나지만 중국인 투자자가 30억 사기 관련 고소를 걸었는데, 진술에 응하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던 것에 대해 언제쯤 수사에 응할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밖에서는 성공한 젊은 CEO인척, 엄청난 금수저 인척 코스프레를 하고 다니지만 실상은 수많은 고소에 휘말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짧은 다리를 수없이 휘저으며 고고한 척 물에 떠있는 오리와 같았다.


아마 내 사건을 다루는 검사와는 다른 검사에게 배정된 수사 같았지만, 영오에게 시간 약속을 받아낸 후 검사가 면담을 마치려고 했다.


"저기..."

한동안 대화에서 소외되었던 주원이 입을 떼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여태껏 한 번도 물어보지 않고 말했던 주원이 갑자기 무게를 잡기 시작했다.


"말씀하세"

검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원이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못하게 할까 봐)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번 사건을 민사로 걸지 않았습니다. 제 일 년 연봉보다 높은 금액을 편취당했지만, 저는 제 이익보다는 공익의 목적을 가지고 이번 소송에 임했습니다. 몇천만원이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큰 금액일 수 있는데, 거짓말로 점철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사기를 치는 이런 사람을 민사적으로만 상대하면 저같은 피해자가 양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겠지만 범죄기록을 만들어 두는게 좋은 예방책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니 이 점을 숙고해 주시기 바람"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꽤나 길게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중간중간 검사가 고개를 끄덕일때마다 영오도 같이 끄덕여 줬다. 자기 욕하는건데 왜 같이 경청하면서 반응을 해주는건지..


-23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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