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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Jan 05. 2023

시인의 아내

섬세한 시어에 일상은 주름

할멈은 진료실에 문득 들어오면서 내게 시집을 한 권 건넨다. 남편이 시인이란다. 크게 돈 안 되는 집을 벌써 몇 권째 발행했는지라고 말하는 투가 자랑반 무익반이다. 나는 시詩 잘 모릅니더. 단지 법 없이도 살 사람인지라 같이 삼더.


10여 년 전 본인의 유방암으로 수술 후 왼팔이 붓어 살림살이에 힘들어할 때 남편이 많이 도와 고마웠단다. 빛과 그림자라고, 그렇게 남편이 부엌일을 거들고부터 잔소리가 급증했단다. 물론 몸 불편한 본인을 위한 권유라 알고 있지만, 아무리 나를 위한다는 좋은 말도 반복되면 그렇단다.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젠 그 소리가 따갑심더. 이래라저래라, 그걸 왜 제자리에 안 두고 저기에 놯냐 등등 그 잔소리가 정작 나를 위한 것인지 남편 자신을 위한 것인지 몰라도, 지금은 그런 말이 듣기 싫단다.


걱정이 되어 조심하라는 뜻의 시인의 말들에 할멈은 사람이 잘고 좀스럽다고 탓하면서도, 거 동네방네 다 주지 말고 남아있으면 줄 사람 있으니 한 권 줘 보소하고 받아왔다며 시집을 내게 내민다. 하얀 자작나무 표지가 너무 아름답다. [봄은 땅 밑으로 온다]


할멈은 제 일 끝났다는 듯 진료실을 나가면서 내게 한 마디 이른다. 그 뭐꼬, 읽고 감상문 써 달라카데예. 허허 웃으며 할멈이 하는 말이지만, 시인이 했을 것 같지 않은 요구사항이다. 순간 할멈이 고수구나 싶었다. 할멈의 화이불치 검이불루한 모습이 어쩌면 저 시인의 탄생엔 이 할멈이 한 몫했구나 싶었다.


책에 쓰인 예전의 이력과는 달리 지금 받은 시집은 시조집이다. 현대 시조는 참 오래만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들고 한 편 한 편. 삶의 고단함과 관조로 읊은 시들이 가득하다. 특히 '화장을 하는 아내'편에서 세월에 새겨진 상처 없는 흉터에 분첩을 톡톡 두드려 주름살 덮는 아내의 모습을 그린 시는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는 시인의 눈에 꽃 띠 시집올 때 상황이 떠올랐을 것 같아 웃음 짓게 한다.


할멈이 무심코 던진 말은 내게 자발적 강요가 되어 새벽에 갱지를 펴고 몇 자 적어 본다. 할멈 인편으로 독후감을 보내리. 시인은 좋겠다. 늙고 지루할 틈을 지우는 할멈과 사니. 이혼이 두려운 이유가 마누라의 잔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을까 봐 그런다고 한다더니,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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