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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May 06. 2022

초록 친구

다름이 당연

초록은 같은 색인가? 모든 풀잎 녹색이라고 동급으로 취급하기엔 너무 일반화가 아닌가 싶다. 그럴듯하나 다르다는 사이비의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더 좋을 듯하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름도 나이도 같으나 참 다른 친구가 있다.


30년 지기 친구다.

처음 대학교 신입생으로 입학했을 때 그는 복학생 신분의 신입생이었다. 즉 삼수 끝에 입학했으나이 제한에 걸려 그때는 바로 군대를 들어갔어야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복학했다. 나와 학번은 달라도 수업은 같이 들었다.


학내 분쟁으로 수업이 파행을 겪을 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를 읊으며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을 떠들, 그는 돌아서면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받아치며 내 부하를 돋웠다. 그렇다고 그가 사회 정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요, 잘잘못을 모르는바도 아니었지만, 시류의 흐름을 따라가며 모나지 않게 살고 싶어 했다. 선도적 개혁이나 혁신은 천재들의 문제이고 진보의 아젠더가 아니더냐며. 그러면서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를 좋아하는 걸 보면 그에게 변치 않는 사랑하는 님은 조국은 아니었던 거 같.


그의 암기력은 가히 놀라웠다. 하다못해 새벽에 스포츠 채널에 중계된 영국 축구 리그를 다 보고도 시험에 만점을 받을 정도였다.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물으면 간단하단다. 그냥 망막에 사진 찍듯 딱 찍어놓으면 빈칸을 채우는 건 쉽단다. 모르는 단어를 찾아 뜻을 외우고, 해석을 해가면서 공부하는 나의 스타일은 그와 비교했을 때 시간과 범위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다. 그래도 미련한 소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작은 믿음은 있었다.


시험에 관한 그의 능력은 단순히 문제를 맞히는 데 있는 게 아니었다. 친구들과 시험 출제 경향을 얘기하다가 그는 미리 예상 문제를 뽑았다며 다른 학우들에게 보인 적이 있었다. 어떤 과목에서는 그가 뽑은 예상 시험문제의 80%가 일치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대강을 파악한 후, 중요한 요점을 정리하고, 암기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될 과정이었을 텐데, 그런 비슷한 과정일 거라 생각한 내게 그는 피씩 웃으며 스쳐 지나가듯 내게 말한다. "출제자의 의도가 뭘까?" 그걸 생각하고 염두에 둘 만큼의 시간도 없었거니와 공부하는데 그게 중요할까 싶은 내겐 충격적인 접근법이었다.  영화 올드보이의 명대사 '그건 질문이 잘못된 거야'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문제가 주어지면 바삐 답변을 놓으려 서두르는 내겐 그의 건너뛴 발상에 내 스스로의 한계성을 인정하게끔 침묵케 하는 말이었다. 대학 생활 내내 재시험을 보느라 방학의 반을 보내야 했던 나였으니.


병원 수련의 생활을 끝내고 전문의를 딴 직후 그는 바로 한의원을 오픈했다. 체 1년도 안돼 그는 폐업을 하고 바로 대형 한방병원 과장으로 직장을 옮기더니 그 후론 승승장구하여 병원장까지 오른다. 그에게 치료보다는 경영이 더 중요하고, 그 많은 병원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걱정 병원 발전론을 주장한다. 그와 만난 술자리에서 진단과 처방의 까다로움을 토로할 때 그는 "병 급성, 만성으로 나눠 예상해서 처방해 놓으면 쉽지 않나? 요즘은 기성복이 맞춤 양복보다 대세라 개인 맞춤형이 좋긴 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단계적 처방을 미리 구성해놓고, 혹 필요한 경우 다른 부가 서비스로도 좋아지게 하면 되지 않나?" 그물을 쳐놓고 미끼를 던져놓으면 굳이 낚시로 하나하나 잡는 방법보다 더 많이 쉽게 잡는 방법을 제시한다. 의료를 서비스 개념으로 접근하여 편리성과 마케팅에  집중하는 요즘의 상업적 행태가 주류지만, 그래도 사람마다 각각의 체질과 병인 및 병의 진행과정에 따라 치료를 달리해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 말에 그는 예의 피식거리는 웃음기의 말투로 "러니 간호사 교육을 많이 시키라"라고 이른다.


친구 모친암으로 투병 중일 때, 나는 그에게 엄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너일 테니 네가 직접 한약을 처방하는 게 어떠냐고 했을 때 그의 대답은 나와는 다른 치료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수의 유명하고 훌륭한 교수에게 의뢰하고자 했다. 즉 본인의 위치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력과 재력으로 암의 권위자에 직접 위탁하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기회의 시간을 보냈다. 부고를 전해 듣고 조문 갔을 때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최고의 의료진으로 치료해서 최선을 다했노라며 오히려  담담해했다.


최근 만났을 때 얼굴이 좀 바뀌었다. 라식으로 안경도 벗고, 이마 주름도 펴져있었다. 지위나 권위로 봤을 때 초록 친구는 이미 나와는 거리가 멀찍하게 계층적 구분을 지울 정도의 격차다. 가끔 주위에 그런 친구를 가졌노라 자랑하기도 하지만, 문득 허전해오기도 하다. 가끔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낸다. 초록이 동색이라고 하지만, 태 방망이 깎는 노인을 그리는 나의 고리타분함이 나는 마음에 든다. 더 나답고 더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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