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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May 12. 2022

찰나미 刹那美

이 순간, 예쁘다

나는 남자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고 배웠다. 생계를 책임지고, 가정을 보호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게 남자다. 그렇게 자랐다. 생전에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던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함 참된 지금까지도 사랑한다는 말이 없다. 그게 남자라고 생각했다. 묵뚝뚝하지만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다.


어린 시절. 꽃은 나무의 이파리 끝쯤 달린, 모양과 색깔이 좀 다르게 생긴, 열매 맺기 위한 기관일 뿐이었다. 화환이나 꽃다발은 기념식을 위한 장식이었고, 상투적인 의례였다. 꽃이 예쁘다고? 무슨 말인지 몰랐다.


어느 봄날 고등학생 때의 늦은 하교길. 그날따라 밤안개 자욱하고, 어디선가 꽃냄새가 가득했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무렵 더욱 향기가 진했다. 아카시아 향이었다. 바람 한 점 없이 듬뿍 고인 향기는 포근했다. 그야말로 '암향조차 부동 터라'란 말이 딱 이었다. 그냥 '야! 향기 참 좋네'가 다였다. 그런데 그 향기의 추억이 오래갔다.


그 후로 내겐 향기 없는 꽃은 꽃이 아니었다. 꽃은 모름지기 향기가 있어야지, 모란이 아무리 예쁘기로 벌조차 가까이 않는 그런 꽃은 여왕이란 칭호가 회자되어도 난 무심했다. 그렇게 꽃향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대학 신입생 때 교문 안에 핀 라락은 내 믿음을 더욱 굳혔다. 바람결 따라 은은하게 풍기는 라일락에 반했다. 그렇게 향기 좋은 꽃만 꽃이었다. 치자꽃이 그랬고, 히아신스가 그랬다.


동백섬에 가서 그렇게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을 봤을 때도 그냥 그랬다. 바닥에 떨어져 길가를 붉게 적신 꽃잎이 귀찮을 지경이었다. 시들지도 않고 그저 툭 떨어진 꽃들을 보고 걸어도, 꽃길을 수놓는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성가셨다. 그러다 한 번은 봄볕을 쬐고 걷는데 동네 아파트 틈새 정원에 아무도 돌보지 않은 동백나무 한그루를 봤다. 손을 타지 않았는지 정돈되어있지는 않았지만 엄청 키 큰 나무에 파란 잎 사이사이로 한가득 동백꽃이 피었다. 무심코 그 동백을 보는데 순간 그렇게 환해 보일 수가 없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가득 꼬마전구가 켜진 화려한 동백꽃이었다. 걷지도 못하고 눈도 깜빡임 없이 넋 놓고 바라봤다. 얼굴이 간질거려 손으로 문지르다 눈물인 줄 알고, 궁상맞은 생각에 고개 숙이고 얼른 훔쳤다.


그 후로 이상하게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나 하얀 꽃이 그렇게 예뻐 보였다. 흰 꽃은 상가집 흰 국화만 여겨져 꺼렸는데, 의외로 그 순백이 아름다웠다. 심지어 바닥에 소복하게 떨어진 오동나무 보라꽃도 귀해 보였다. 그래도 꽃다발을 산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꽃을 든 남자'란 광고 문구는 젊 예쁘장한 남자 연예인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날도 아침 일찍 운동 삼아 걷다 강가를 돌아 집으로 오는데, 길에 가판대 위에 꽃을 놓고 파는 게 보였다. 이름 모를 꽃이 한가득인데 싱싱해 보였다. 꽃 도매상인데 가끔 이렇게 좌판 깔고 팔기도 한단다. 그래서 한 다발 샀다. 집에 와서 출근 준비하는데 집사람이 그렇게 좋아했다. 웬일로 꽃이냐고. 그저 마치 야채 사온 듯이 '싱싱해 보이길래' 고 툭 내뱉듯말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그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괜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며칠 못 가고 시들 꽃을 저리 좋아할까 하는 생각에 참 별것 아닌 걸로 좋아하는 구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인생 또한 순간이요 찰나 아닌가 하는 생각. 곧 없어질 유한이기에 안타깝고 애틋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 어쩜 그 가슴 저린 순간들이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생각. 1년을 준비하고 하루 사는 하루살이. 그 짧은 환희를 위해 기쁘게 기다리는 순간들. 그래? 그렇다면 기꺼이.


다음날 그 시간에 그곳에 다시 갔는데 좌판은 깔리지 않았다. 주변에 물으니 매주 화요일마다 온단다. 그래서 다음 화요일 새벽 그곳에서 기다렸다. 꽃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다. 기다리면서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설레었다. 잠시 후 가판대가 깔리고 꽃이 몇 광주리 내려졌다. 사장은  첫 손님이 마음껏 고르란다. 내가 무슨 미적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눈에 띄는 대로 골랐다. 그런데 꽃 묶음을 골라 뽑는 내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한 껏 사서 나눠 줄 사람을 떠올리면서 좋아할 그들을 생각하 더 신나 하는 내가 낯설다.


근처 엄마 집에 들러 한 묶음 건넨다. 그러고 보니 나이 50 넘어도 엄마에게 꽃을 건넨 게 처음이네. 향기가 별로 없는 꽃인데도 엄마는 코를 가까이 대면서 연신 예쁘다 연발이다. 집이 환해졌다며 오래 간직하겠단다. 10분도 안돼 집을 나섰다. 더이상 오래 머물 수 없다. 내가 이상해진다. "간다." "응, 그래. 꽃이 참 곱다. 고맙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나도 사랑 뭐시기 그 말이 어색하다. 그래도 꽃을 전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쳇, 다음에 하지. 꽃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 그건 모르겠고, 꽃을 고르고 건네는 기분은 좀 알겠다. 순간이고 뭣이고 남자로 꽃을 들어봤다, 숙쓰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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