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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삐 여사의 미소

좋아하지 않아도 어울린다면

by 노월

언덕길을 내려오는 그녀는 연한 아이보리색 줄무늬 원피스가 하늘거리고 옅은 미소가 수줍음을 띤다. 차려입은 모습이 간만의 외출인 듯 가볍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타고 시동을 건다. 살짝 찡그린 표정이 어딘가 불편한가보다. 늘 편두통을 달고 산다는 그녀는 통증이 자주 발생하는데도 여전히 방법을 찾지 못한다. 편두통은 참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도 하지만 한 번씩 깨질 듯한 심한 통증이 나타날 때는 병원행이다. 그래도 오늘은 어깨가 살짝 뻐근한 정도를 동반한 가벼운 두통이다.


오늘 동생들과 약속이 있다. 기분 전환에는 쇼핑. 계절은 아직인데 매장엔 다음 시즌 상품들이 진열된다.


위로 두 오빠가 있고 밑으로 두 여동생들이 있다. 중간에 낀 위치는 대체로 상황 살핌에 밝다. 돌아가신 엄한 아버지의 눈에 벗어나지 않으려는 전략이 몸에 뱄지만, 어디까지나 잔소리나 야단에서 모면하려는 눈치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고함치는 아버지에 눌려 아무 말을 못 하고 미리 다른 형제들의 대답과 결과를 먼저 살핌에 민감했다. 먼저 본인의 의견을 드러내기보다는 분위기 편승이 편하다.


어려서부터 답변을 주저하면서 결정을 보류하고 미루는 버릇이 성격이 되어버렸을까.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투가 마모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는 선택의 상황에서 결정을 미룬다. 이럴까 저럴까 그녀의 판단 보류로 시간에 쫓기다 결국 타인의 의견에 의지하게 된다. 동생들에게 물어보고 그들의 견해를 듣고 나서야 마음을 정한다.


사실 마음을 정한다기보다 그들의 의견을 따른다. 동생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그런지 그들의 결정을 따라 하면 그럭저럭 결과가 나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런 만큼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은 그녀에겐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뭐가 더 좋은지 어떤 게 더 적합한지.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경청. 자세는 좋지만 내가 아닌 타인의 견해다.


차도에 서있는 진희를 태우고, 골목으로 들어서서 미희를 픽업한다. 천천히 가도 된다 했지만 차는 방지턱을 울컥거리며 지나다 바닥 긁는 소리를 낸다. 시간 많으니까 서둘 필요 없다는 동생들의 말에도 바쁘게 운전한다. 골목길도 이 정도쯤은 괜찮다는 생각인지 빨리 골목을 벗어나 큰 길가로 가려고 그러는지 엑셀 아니면 브레이크다. 몇십 년을 운전해도 완급조절이 안된다. 뭔가 서두르고 급하다. 이쯤이면 이건 습관이다. 골목길에선 갑작스러운 변수들- 자전거나 킥보드, 달려오는 아이들-의 위험에 빠른 판단과 신속한 조치가 필요해서 더 신경 쓰이게 마련인데도 운전이 바쁘다.


언니는 이 옷이 더 어울려. 동생 진희는 늘씬한 몸매의 언니를 부러워하며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듯 자기 옷을 고르기보다 언니 옷 고르기에 더 열심이다. 그래? 한 번 입어볼까? 미희 네가 보기엔 어때? 막내 미희는 별 관심이 없다. 괜찮네. 자기가 좋으면 사는 거지. 그렇지? 저거보다 이게 더 낫겠지? 둘 다 어울리네.


평가는 기준에 따라 가변적이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라도 본인 잣대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 그게 대단한 거다.


세 자매는 각자의 쇼핑백을 들고 식당에 앉는다. 너흰 뭐 먹을 거야? 진희와 미희는 서로 다른 메뉴를 고른다. 늘 그래왔듯이 진희와 미희가 고른 메뉴와 같은 음식을 시켜왔는데 이렇게 다른 메뉴면 고민이다. 오늘 속이 좀 안 좋아서 매운 걸 시켰어. 진희가 고른 음식을 보고, 그럼 나도 그걸로 할까? 언니는 매운 음식 잘 못 먹잖아. 그리고 이 집은 맵기가 더 해. 그러니 언닌 다른 걸 먹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다른 걸로 먹을까? 미희와 같은 걸로 먹어야겠다. 언니 먹고 싶은 걸로 해. 아냐 나도 너랑 같은 걸로 할게.


무난함을 선택함이 가장 안정적이다. 실수를 해서 눈치를 받느니 두각 되지 않는 편안함이 좋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아닌 유선 전화로 보이스피싱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학교에 간 아들이 다쳐 병원으로 이동 중인데 응급실에서 응급 치료가 필요하니 빨리 돈을 송금해 달라는 전화. 아들 이름도 알고, 멀리 아들의 신음소리도 들린다. 놀란 가슴은 차분함을 뺐고 판단력을 없앤다. 은행 직원의 기지로 모면한다.


주변에 한 번씩 들리는 보이스피싱. 기계를 잘 다룰 줄도 모르지만, 사이버 가상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막연하게 잡히지 않아 더 조심스럽고 어둠 속 누군가의 발소리만큼 무섭다. 공포로 다가오면 상상은 가능치의 최대를 의심하게 된다. 그녀가 인터넷 뱅킹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다. 한 번의 놀람으로 영영 그쪽으로의 길을 회피하게 한다. 역시 익숙한 게 차라리 나아.


그냥 직접 가서 해결하기. 귀찮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않나. 내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보다 더 실제는 없으니. 은행 송금이 그렇고, 장바구니 들고 장보기가 그렇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직접 장바구니 들고 장을 보러 갔어? 날씨가 너무 더운데 얼마 안 되는 돈을 송금하러 은행까지 걸어간 거야?


그거 예쁘네. 어디서 샀어? 응, 인스타그램을 보다 추천 앱이 있길래 깔고 샀어. 내 것도 하나 주문해 줄래? 언니, 그러지 말고 스마트폰 사용을 좀 해봐. 처음이 어렵지 몇 번 해보면 금방 적응한다. 그래 나중에 할게. 잠깐의 미소를 보낸다. 부탁이야 하는 표정으로. 동생들이 혹여 그럴리야 없겠지만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계를 다루는 건 참 어렵다. 적응이 안 된다.


선택 장애니, 결정 장애니 하는 말들이 들리는지도 모른다. 언니를 그렇게 장애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속 시원하냐? 잘못 골라서 곤란한 것보다 낫지 뭐 그래? 남들의 평가가 좋으면, 부러움의 시선이면 약간의 불편함이야 감수해야지. 고르고 선택하는 것들이 좀 난감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고민해서 골라도 거기서 거기거든. 잘 난 체 하긴. 그녀의 미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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