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만 보고도
모든 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정말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길을 떠난다. 지난 세월은 정말 지난한 시간이었다. 생각을 곱씹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아직은 과정이요 진행형이다. 멀리 저 멀리서 뒤돌아볼 쯤에 지금의 걸음이 다만 최선이었길 바라며 그는 길을 떠난다. 타향에서 정착하면 곧 연락하리라 전하며 웅이 아빠는 먼저 떠난다.
여기서도 힘들었는데 거긴 들 쉬울까마는 이미 쉽고 어렵고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파트타임이 끝나면 또 다른 일용직의 일을 찾았다. 가족들이 걱정하며 한번씩 그에게 연락이 닿아 힘들지는 않은지 또는 무슨 일을 하는지의 물음에 그에게서 아직은 이것저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이것을 할지 저것을 할지 미결정의 상태인 줄로 알았다. 그가 이것이든 저것이든 닥치는 대로 정신없이 일을 한다는 뜻인지를 나중 알았다.
잠과 밥이 따로 없었다. 생존을 위한 버팀의 연속이었다. 걸으며 씹어먹었고, 외투를 감싼 체 웅크려 잠을 달랬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따위의 말은 별 도움이 되지도 않았지만 살아내야 하는 입장에선 이런 질문이 여유롭고 한가한 의미 없는 물음이다. 뭐가 잘못됐을까 하는 생각이 한 번씩 들 때도 있었지만 살아야 했고 거처할 공간이 마련되면 가족들을 데리고 와야 할 뿐이다.
차츰 주변이 눈에 들어오고 파트타임의 일용직을 지나 비정규직으로 취업을 하고 드디어 정규직 전환을 하게 됐으며, 지하 셋방에서 전셋집을 거쳐 대출을 끼고 집을 마련했다. 나머지 가족을 데리고 이제 모두 한 지붕아래 같은 밥상을 두고 숟가락을 든다. 아직은 다 같이 둘러앉아 느긋하게 식사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비바람을 피하고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일은 없을 만큼은 됐다.
부인도 일자리를 찾고, 웅이는 전학을 해서 적응한다. 새로운 환경의 적응에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지금까지의 상황과 비교하면 이만하면 괜찮다고 할 정도다. 지금보다 더 좋고 더 낫고 더 편안한 생활은 사치다. 다시 바닥에서 시작했으니 힘들 일이 없진 않으나 갈수록 더 나아질 것이란 가능의 희망만으로도 좋다.
부모의 삶을 통해 성실과 정직을 보고 자랐지만, 자식은 부모와 또 다른 세대다. 고생시킨 처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이 머물고, 안정이 됐다고는 하지만 아들 웅이의 힘듦을 헤아릴 여유까지는 없었던가 보다. 웅이 얼굴을 보거나 차분히 앉아 얘기할 짬이 쉽지 않게 여전히 바쁘고 지쳐있다.
과정을 훑듯 지날 수는 있지만. 건너뛰고 넘어갈 수는 없던가보다. 사춘기의 아들은 사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그걸 다 할 수는 없음을 잘 안다. '내 형편에 무슨'이란 생각에 스스로 욕망을 삭이고, 주변의 화려함에 주눅 들 때면 게임에 빠져 현재를 잊는 게 그나마 위안인 날들. 아빠에게서 공부하란 잔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웅이 자신에겐 막연한 불안감이 떨쳐지지 않았고, 뭘 위해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하고 싶은 게 있어야 공부할 생각을 하지.
뭘 하고 싶다든지 뭔가 되고 싶다는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고 있지만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될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불쑥불쑥 올라와도 어찌 되겠지라며 덮긴 했는데도 어느 날은 떨쳐지지 않는 망설임을 어찌하기 힘들다. 방황하던 웅이가 엇길로 새지 않은 것은 아마 아빠의 뒷모습이 아니었을까.
"아빠, 어떻게 살아야 돼?"
만약 웅이 아빠가 성공한 삶을 살아왔다면 '사는 건 말이야 이런 거지'라며 자신이 해쳐온 해법을 제시하며 너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려 노력했겠지만, 그는 다른 답을 한다. 미안한데 아빠도 잘 모른다.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냥 열심히 살아왔다. 하다 보니 길이 보이기도 하더라.
큰 기대를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아빠에게 정답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아빠도 모른다는 대답을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웅이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하는가 보다고 은연중에 마음을 먹었던가보다. 무슨 도움을 바라는 싹은 애당초 없었다.
이후의 다른 물음에도 웅이 아빠는 나도 잘 모른다는 입장이었다. 향후 미래가 어떻게 변하고, 빠른 흐름에 어떻게 대처하고, 뭘 준비해 두면 좋다는 식의 말들은 본인이 언급할 범주를 넘어선다는 듯이.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미안하다고. 하다 보면 할만한 일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웅은 목표가 있어 선택한 학과는 아니지만 대학을 입학하고, 친구와 주변을 통해 다른 선택지들을 기웃거려 보면서 찾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뚜렷한 방향이 잡히지 않는다. 누가 뭘 한다면 나도 해볼까 마음먹기도 하고, 시도해 보다 곁다리의 좀 다른 것이 눈에 띄기도 하고 더 끌리는 게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웅이는 근사한 회사는 아니지만 공무원이 되고, 친구의 소개로 은행을 다니는 여인과 결혼을 한다. 예전의 주눅 든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름 자신감 있게 잘 산다.
웅이 너 좋아 보인다. 어떻게 한 거야?
예? 전 뭐 특별히 어떻게 한 건 없어요.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세상에 그냥 했다는 놈이 제일 무섭다더니 웅이는 쟤 아빠가 한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