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의 의도

나 미리 말했다

by 노월

슬쩍 주변에 본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알린다. 자신이 꾸미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인지 말하지 않고, 목적도 말하지 않고 날짜만 반복하여 알린다. 험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나의 그런 꼴을 보려면 그날 오라고. 결기가 느껴지지만 당위성이 의심되는 노인의 말이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 일이 옳은 일 같지도 않고, 그 일이라는 게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당위성 같은 간절함도 와닿지 않는 일방적 선언이다.


원하다면 그냥 하면 될 일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저지하려 하지 않는데 굳이 조만간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고 거듭 언급한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으니, 더 붙잡고 부디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인가 보다. 일의 중요성보다 다른 의도가 있어 보인다. 또한 그 일이라는 게 실행 가능성이 낮거나 비현실적임음을 본인도 모르지 않는 눈치다. 주변에 알리는 그 일이란 게 사실은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음이라. 그러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어주거나 그 일을 하지 않게 말려달라는 뜻처럼. 그런데 왜?


아빠, 왜 이래?


시장에 들러 과일을 사서 노인의 집을 들른 딸의 급박한 목소리. 떨리는 목소리로 형제들에게 전화를 한다. 다들 빨리 와. 아들이 오고 며느리가 오고 사위가 온다. 노인은 어제 딸과 통화하면서 노인의 집에 몇 시에 들를 거냐고 물었고, 딸은 장보고 나서 4시쯤 가겠다고 하고선 와보니 노인이 천정에 줄을 연결하여 목을 감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서 무슨 영광이 있고 무슨 낙이 있으리. 내가 죽어야지. 다들 모여 놀란 모습인데 노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한 손엔 줄을 잡고서 다른 손으로는 방바닥을 치며 운다. 어설픈 위협이기도 하고 절박한 협박이기도 하다. 외롭고 슬픈 시위다.


그가 한 번은 노인을 찾은 적 있다. 맥주와 안주거리를 들고 방문했을 때 노인은 기쁘게 맞으며 젊어서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고, 그땐 그랬지. 기실 그전에도 그가 몇 번을 들었던 내용인데 노인은 자신의 과거사를 마치 처음 얘기하듯이 캔을 다 비우도록 기억의 회상에 젖는다. 우여곡절과 성공담이 이어진다. 밤이 깊어 그만 일어나는 그에게 노인은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래 시간 나면 또 와주게. 오늘 즐거웠다.


자주 찾아가진 못했지만, 그가 몇 주 후에 다시 들렀을 때 노인은 뭔가 심기가 불편한지 앉자마자 자식을 욕하느라 바쁘다. 자식을 어떻게 키웠는지, 직장 구할 때 본인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결혼할 때 며느리감 구한 얘기, 전문직 사위 얻느라 얼마를 건네었는지. 그런데 자식들이 자신에게 이럴 수 있냐는 푸념이다. 자주 찾아오지도 않고, 잠시 들러도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아쉬운 일이 있거나 부탁할 일이 있을 때라야 며칠 들락거리다 일이 해결되면 다시 뜸하게 얼굴 보기 힘들다고.


그는 노인에게 다들 먹고살기 바빠서 그렇지 않으냐 말해보지만 노인의 섭섭함을 덜어주진 못한다. 아비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몸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자주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을 탓하는 마음과 함께 노인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그 무료함이다. 하루하루를 버티고 견디듯이 지낸다. 오늘은 또 뭘 하지?

형편이 그럭저럭 넉넉하고, 특별히 아픈 곳 없으며, 속 썩이는 자식이 없는 편안한 노인은 부러운 대상인데 정작 본인은 혼자 괴로운가. 바쁨보다 일 없음이 더 견디기 힘든 탓일까?


퇴직하고 얼마 동안의 생활은 오히려 여유였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노인은 할 일 없음을 못 견딘다. 바쁘게 열심히 살아온 이들에게 주어진 무한의 시간은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하는 무력한 방황이 되기 쉽다.

지금껏 세상이 의도한 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유지되던 긴장이 레일을 벗어난 바퀴처럼 갈 곳을 잃어버린다. 노인에게 의미를 부여한 것들은 밖에 있었던가 보다. 외부에 의무감과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노인은 서 있을 곳을 잃는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


그는 노인에게 더 이상의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취미를 가져보라느니, 좋아한 일을 다시 시작해 보라느니, 봉사는 어떨까란 권유나, 익숙한 일을 매일 해보라는 등의 말을 하기엔 노인의 의지가 많이 꺾여 보였다. 배고파 먹는 음식이 아니라 때가 되어 살아있기 위한 끼니요, 졸려서 자는 잠이 아닌 밤이 되어 밖을 나갈 수 없어 누워있음이요, 재미없는 하루가 너무 길다.


오히려 노인은 그에게 착화탄을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었으니. 심심함을 넘어 지루해하는 노인을 두고 나오기 힘들었다. 잠시 반짝 관심을 보이다 금방 싫증을 내는 아이를 달래기 힘든 건 그가 원하는 걸 알기도 어렵거니와 그게 뭔지 알아도 그건 아무도 채워줄 수 없음이라.


미수의 사건 이후 착화탄을 찾던 노인은 결국 착화탄을 샀지만 시도하지는 않았다. 뒤척이는 불면의 밤에 문득 찾아온 노인의 모친이 꿈에 나타나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더란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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