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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May 18. 2022

지룡 귀토

흔적 없이, 흙이란 흔적으로

비가 온 후 또는 흐린 날씨에 길가 많은 지렁이를 본다.

징그럽고, 쓸모없어 보이고, 연약하다는 생각에 인간 시각에서 하등동물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가만 살펴보면 지렁이는 흙 속 생태에 가장 적합하게 생존하고 있다. 그 나름 최적 적응자다. 누가 감히 무시하는가. 이 지구에 같은 땅을 밟고 사는 동등한 생명체로써 우린 평등하다.    


 한 번은 얕은 물 웅덩이에 익사한 꽤 큰 지렁이를 봤다. 물 속이라 몸이 불어있었고 움직임이 전혀 없이 바람 물결 따라 덩어리 전체가 일렁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이 말라가고, 지렁이는 흰색으로 탈색되더니 어느 순간 물이 완전히 마르고 나서는 마른 흙 위에 지렁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챙이로 흙을 뒤적여봐도 흙뿐이다.


 삶과 죽음이 유리되어있지 않다는 걸 잘 알지만, 아무리 사라짐을 같이 하는 삶이라, 담담히 관조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닌지라, 기뻐 웃고 슬퍼 눈물 난다. 담담함이 무감각이나 무감정은 아닐 터. 흔들리는 이 마음이야 어쩌겠나. 자연스럽다.


지금 이 생이 영원할 것처럼 느낀다. 과연 죽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영생이나 불사의 방법이 있을까? 

확실 방법이 하나 있다. 반야심경에 생불멸이라고 하지 않았나. 깨우치면 생성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상태가 된다는 뜻을 난 그만 촌스럽게 해석했다. 태어나지 않으면 죽음도 없다. 어쨌거나 이 방법은 이미 걸렀다. 손 쓸 틈도 없이 태어나져 버렸으니.


또 한 가지는 살면서 죽음을 확실하게 각성하는 것이다. 해탈이나 열반은 또 다른 소멸의 상태요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한번 죽으면 다시는 죽음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야말로 죽어야 산다. 그러나 그런 지독한 견딤의 극복이 아닌 한, 그나마 존재에 대한 집착을 조금씩 줄이는 게 현실적 타협이다.  

   

 평생 흙 속에서 태어나 흙에서 살다 흙으로 사라진 지렁이처럼, 우린 남녀의 바람 속에서 태어나 바람을 피우며 살다 바람으로 흩어지는 거 같다.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으면, 바람이 없으니, 바람 따라 먼지처럼 사라진다. 쩌면  으고 흩는 바람결의 장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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