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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Nov 14. 2022

도첩권모(倒睫拳毛)

눈을 찌르는 속눈썹

생소한 단어. 무슨 도둑을 일컫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권모술수의 권력과 관련된 단어 같기도 했다. 그러이 용어는 한의학에 나오는 안과 질환 중의 속눈썹과 관련된 병명이다. 본디 속눈썹은 눈으로 들어오는 먼지를 거르고 외부 이물질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안구를 중심으로 밖으로 휘어 자라게 되어있는 터럭인데, 비脾의 풍열風熱로 인해 속눈썹이 거꾸로 안으로 휘어 말린 듯 자라나 오히려 눈을 자극하고 찌르는 증상이다. 외부로부터 안구를 보호하기 위한 구조가 그 칼 끝을 내부로 돌리면서 내부의 적이 되어 본질을 괴롭히는 도첩권모.


중소기업에 다니는 친구 진우는 어느 날 고교 동창생의 여동생을 소개받는다. 동창은 진우가 운동도 잘하고 활동적이며, 사교성은 별로 없지만, 성격상 진중하고 순수하여 동생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겠다. 예쁘장하고 늘씬하며, 차분하면서 어딘가 가냘픈 여성적인 외모의 여동생을 처음 본 순간 진우는 관심을 갖게 됐고 교제를 시작했다. 진우의 모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남동생들로만 구성된 시커먼 남자들만 있는 집에서 자라서 그런지 진우에게 여성이란 반드시 도와주고 보호를 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더구나 도움을 필요로 할 것 같은 어여쁜 여성이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나 보다.


그렇게 결혼하고, 애 낳고, 별 어려움 없이 잘 사는 줄 알았다. 가끔씩 만나 술 한잔 할 때면 그는 결혼 생활에 만족해하면서도 부인의 약한 체력과 잦은 병치레를 조금 걱정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야 어느 집안이든 있을 수 있는 약간의 사소한 문제 정도이지 않을까. 그가 몇 번이나 같이 운동을 하자고 권해도 운동을 힘들어하는 부인의 표정에서 그는 그저 알았다고 물러났다. 마지못해 깨작거리듯 며칠 하다가 그만 두길 몇 번. 포기하듯이 그냥 타고난 약체려니 했단다. 큰 병만 없으면 됐지 하고. 억지나 강압의 형태는 애초 진우의 성격과도 맞지 않았다.


최근 만난 그는 여전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으나, 요즘 어때라는 말에 순간 뜸을 들이는 느낌으로 잘 지낸다고는 했지만, 한 박자 쉬고 말하듯이 말투에서 뭔가 흐릿하고 찜찜하게 맴도는 느낌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몇 년만의 만남이긴 했지만, 오랜만의 만남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일이 있는데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소주 두 병을 비울 무렵, 난 짓궂게도 뭐가 있는데 도대체 뭐냐고 직접 질문을 던졌다. 대답 대신 같이 담배나 한 대 피우자며 나갔다. 그의 내뱉는 연기가 길었다.  


작년 부인이 유방암으로 진단받고 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초기 진단으로 수술도 잘 되었단다. 다만 코로나로 인해 제대로 면회를 가기도 힘들어 한 번씩 가긴 해도 주로 전화로만 연락을 했고. 병원 근처에 처가가 가까워 수술 후 퇴원해서 1년간을 처갓집에서 기거하면서 항암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거의 회복단계에 들었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상황인데 왜 근심 섞인 목소리일까 되물으려다 기다렸다. 진우는 연달아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혹시가 역시로 확인된 느낌이라면서도 그는 부인의 이후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1년 동안 친정집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졌다고 해도 이젠 집에 돌아와서 통원치료를 해도 될 텐데, 아예 집으로 오려는 시도조차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즉 따로 방을 얻었다는 것이다. 너무 뜬금없는 얘기다. 아니 왜? 멀쩡한 집을 두고 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 또한 물으니 하는 말인데 하면서 그 명확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부인은 진우에게 내색은 않았지만, 진우도 설마 하는 짐작은 했음직하다. 부인의 결혼생활이 그의 결혼생활과는 달랐나 보다. 뭔지는 몰라도 그리 만족스럽진 않았나 보다. 아마도 부인에게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계획이 현실과 부합되지 않았거나, 진우라는 인물에 대한 실망이었거나, 아니면 다른 바람이 있었거나, 추측만 할 뿐 그도 부인의 생각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던가 보다. 그렇다면 뭔가 삐그득 거린지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저 이 놈은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뭐 별 탈이야 있겠냐는 식으로 계속 지내온 듯하다.


그는 얼른 말을 덧댄다. 부인이 바람을 피우거나 이성의 문제는 아닌 건 확실하다며. 그런 건 아니라며 못을 박는다. 방을 얻은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이번엔 더욱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처갓집 생활을 하다 항암치료도 끝나고 나서는 마치 통보하듯이 방 하나를 얻었다는 연락만 오고, 어디에 얼마짜리의 방인지도 일러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부인은 오빠를 데리고 같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단다. 손위 처남이지만, 그건 처갓집에서의 예의고, 밖을 나오면 자연히 고교 동창생이요 서로 야, 너 하는 친구다. 그러나 그 둘은 그리 친하지가 않았다. 내가 보기엔 처음부터 성향이 서로 다른데 어찌 동창은 진우에게 여동생을 맡길 생각을 했을까. 이미 지난 일들이라 의미가 없기도 하지만.


가족으로 서로 묶여있을 뿐이지, 명절에 가끔 얼굴 보는 정도라고 한다. 동기회 모임을 활발히 하는 입장이 아니다 보니 서로 잦은 소통을 하는 편은 아니라며. 그런 그를 대동하여 부인은 오빠라는 뒷배를 둔 듯이 동행하여 진우와 만났다.


전후 사정의 이해나 설득도 부족한 상태에서 부인은 대뜸 혹 나중을 위한 것이라며, 본인을 위해 무슨 확인서를 써달라는 것이다. 이번에 암에 걸리고 보니 금전적 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며. 부인은 이번 유방암 수술진단비로 보험사에서 받은 보장으로 치료비를 지불하고도 몇 천만 원의 잉여금이 남았는데, 진우는 아마도 그 여분으로 방을 얻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확인서. 제목이 뭐가 중요한가. 보기에 따라서는 각서라고 한들 지불보증서라고 한들 뭐가 다른가. 진우는 왜 이러느냐고 물어도 부인은 불안해서 그런다고만 했단다. 그리고 확인서를 받아도 공증 없이는 의미가 없다고 해도 부인은 종이를 내밀었고, 동창은 옆에서 거든다. 그렇게 의미가 없는 것이니 그냥 써주면 되지라고.


써줬겠네? 그래 써줬다. 이게 뭐하는 상황인지 참 황당하다면서 그렇게 원하면 써준다고 하고 써줬단다. 내용은? 뻔하지 뭐. 돈? 진우는 웃으며 소주잔을 들이킨다. 그래 2억 써달랜다.


아들이 성인으로 자라 타지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같이 20여 년을 살아왔는데, 그렇게 부부로, 서로 내편으로, 별별 일들 같이 겪으며 그럭저럭 잘 지냈는데, 무슨 별 것 아닌 별거가 되어버렸단다.


진우는 연신 눈을 깜빡인다. 눈에 티가 들어갔는지. 낮에 비가 오고 나서 먼지도 없는데 자꾸 눈을 비빈다. 제법 충혈까지 됐는지 눈이 벌겋다. 그렇게 하면 눈 상하니 그만 비비고 참아라고 했다. 정 갑갑하면 거울 보고 오라고, 아마 눈썹일 수 있다고.


눈을 보호하는 속눈썹이 거꾸로 자란 건지, 아니면 원래 아랫 눈꺼풀에 있어야 할 눈썹이 윗눈꺼풀에서 자란 건지 그렇게 도첩권모가 되어 눈을 찌른다. 마스카라를 쓰든지, 속눈썹 파마를 해야 하는지? 그렇게 중년의 나이에 눈을 자극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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