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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Nov 22. 2022

기억 소실

늘 새로워서 더 생소한

내가 나를 돌아봐도 참 답답하다. 어떻게 그렇게 기억을 못 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의 일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한 달 전 아니 지난주에 봤던 사람도 처음 본 듯하다. 차트에 기록한 내용을 보고 나서야 겨우 아, 그랬구나 하고 다시 생각을 재생해낼 뿐이다. 그냥 얼굴만 봐선 연관된 무엇이 떠오르지 않는다. 더구나 마스크를 쓴 얼굴이라 내 분별력은 더욱 저조하다.


학생 때 시험을 치고 나면 으레 몇 번 문제의 답이 뭐냐고 물어보고 맞춰보기도 하면서, 서로 본인들이 정답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책을 펴가면서 본인이 옳다는 근거를 대기도 할 때쯤, 내게 답을 구하는 친구의 물음에 난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한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답을 뭐라고 썼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그런 질문 문항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시험지가 다른 것도 아닌데, 난 그런 문항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금방 치른 시험에 대한 얘기인데도 나의 기억에서 문제도 답도 빠져있었다.


예과 시절 한의학 원론 시간에 배운 맹자를 암송하여 수업 때마다 읊어야 하는 구술시험을 쳤다. 어려서 서당 경험 있는 친구들은 읊조리는 수준이 아니라 리듬을 타고 외는 소리는 타령까지는 아니라 해도 좋았다. 그러나 그 순번에서 나는 늘 원론 수업이 부담이었다. 다행히 낙제는 아닌 걸 보면 그래도 점수를 받았던가 보다.


이유가 뭘까? 어디서 뭘 먹었고 그 식당 이름이 뭐였으며 등등을 얘기할 때도 나는 기억이 별로 없다. 무심한 건가 아니면 딴생각을 하느라 그랬을까? 그나마 인상에 강하게 남은 정도는 기억을 한다. 사건이나 스토리가 있어 공감을 한 장소도 기억은 한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친다. 특히나 고유명사를 언급할 때면 꼭 들어맞는 건 아닌 비슷한 단어만 떠오른다. 아마 글자 수가 몇 자이지 않나 하는 정도다. 다만 이해력이나 응용력은 있어 그럭저럭 세상에 적응하나 보다. 주변에서 간혹 어떻게 그런 머리로 한의사가 됐냐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두세 번 만났는데도 늘 새롭다면 만날 때마다 신선할 수도 있겠으나, 대상이 사람이라면, 더구나 치료를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환자와의 관계라면, 기왕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환자 입장에서도 이전 진료시간에 한 얘기를 잘 기억 못 하는 의사와는 신뢰의 문제까지 야기될 수도 있겠다. 그러한 내가 나도 마음에 안 든다. 비록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미안하다.


가끔은 낯선 장소에서 그를 만나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하여 겨우 어렴풋하게 기억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가 어디 아팠는지 어떤 속내를 얘기했는지는 기억을 못 한다. 그게 다행인 경우도 있지만 좀 어색하고 생소하다. 그가 고맙고 반갑게 인사할수록.


이런 망각력을 채우기 위해 가능한 한 차트에 자세히 기록한다. 그를 위해서가 아닌 나의 답답하고 미안함에 대한 대비이기도 하다. 다만 지난번 불편함이나 통증이 무엇이었든 간에, 지금의 시각으로 다시 진찰을 한다. 그리고 현재에 가장 필요한 적합함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기억 못 하는 답안 제출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졸업했듯이, 비록 다시 내원한 초진처럼 보이는 재진환자에게 나는 초심으로 대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시간이 더 걸린다. 그러니 많은 사람을 진료하기 버겁기도 하지만, 환자가 많은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 부富와는 멀다. 내 그릇이려니 한다. 그러다 보니 꼼꼼하다느니 성심성의란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건 실상을 모르는 비밀인 것이다.


주변에는 일부러 환자의 기존 내원 기록에서 처방을 굳이 참고하지 않고 진료를 하는 원장도 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환자의 몸 상태도 바뀌었을 테고, 내 시각도 바뀌었을 수 있으며, 계절도 변했으니, 현 상황에서 그를 처음 본 듯이 다시 진찰을 하기 위해서란다. 그렇게 진료를 하고 처방을 구성해놓고 나서야 전의 처방과 비교를 하고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최종 처방을 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익숙함에서 새로움을 찾는 게 쉽지 않듯이, 새로움에서 익숙해지는 것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낯선 데서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낯섦이 익숙한 상황이라면 대신하여 깨어있어야 한다. 기억의 소실로 맨날 날 것같이 낯설다면 우린 오늘 처음 만난 거다. 그렇게 맥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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