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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Nov 27. 2022

마른 습기

늦가을 쌓인 배추더미

김장철인가 보다. 시골의 어느 배추밭엔 얼마 전 거두고 남은 배추 겉잎이 수북하다. 최근 비도 거의 없었는데 쌓인 배추더미 밑으로 젖고 물러진 배추의 채수가 흐른 자국이 있다. 더미 위에 얹힌 배추는 바싹 말라 누렇게 건조한데, 속엔 젖고 뭉개진 배춧잎이 짓물렀다.


조燥와 습濕에 대한 토론을 할 때였다. 진단에 있어 음양을 살핌은 가장 기본이요 필수다. 다만 이 음양의 범주를 어느 기준에 잣대를 두고 나눌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즉 가장 기본적 고려 사항을 무엇에 둘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 체형에 따른 말랐는지 뚱뚱 한 지의 조습을 우선 볼 것이냐, 추위와 더위의 민감도에 따른 한열을 먼저 고려할 것이냐, 체력의 여부에 따른 허실을 살필 것이냐 등등의 구분이 기본이 된다. 또는 성격의 예민함과 긴장도 또는 감정 기복의 심한 정도 등으로 음양의 불균형을 보는 기준으로 삼는다. 


어디가 아프고 불편해서 왔느냐보다 평소의 기운 흐름이 주로 어느 쪽이냐, 얼마나 치우쳐있나를 먼저 염두에 두고 나서 병의 원인을 따진다. 그러니 어디 아프면 무슨 처방이 아니라 우선 '어떤 사람이냐'를 보는 게 본本을 보는데 더 가깝다. 


마른 체형의 燥한 사람은 처방도 당연히 몸의 정혈을 돕고 윤기를 더하는 방향으로 일단 기준을 삼고, 살집 있고 퉁퉁한 체형의 濕한 사람에게는 습기를 줄여주거나 활동을 도와 습기를 제거하도록 방향을 잡는다. 이런 방식이면 같은 질환이 있더라도 처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습도의 과부족에 의한 조습이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쳐져 있는지 살펴 음양 균형을 염두에 두고 나서 질병에 관한 부분을 고려한다면, 처음 호소한 질병뿐 아니라 평소 불편했던 증상을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같은 비염환자라고 해도 마른 체형과 퉁퉁한 체형의 비염 처방은 아주 다른 방향으로 처방을 구성하게 된다. 비염과 관련된 약물을 가감하긴 해도 애당초 기본방이 다르다. 


그런데 조습이 서로 섞여 혼잡된 경우엔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살집 있고 퉁퉁한데 피부가 거칠고 건조한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그 음양의 기준을 잡을 것이냐는 말이었다. 피부가 그러하니 조燥로 볼 것이냐, 원래 체형이 그러하니 습濕으로 볼 것이냐의 물음이었다.


설명이 다양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원래 습濕이 낀 상태에서 열熱이 동반된 경우라는 것이다. 마치 밥이 다 될 무렵 끓던 밥솥에 뜸을 들이려 불을 낮추면 나중 솥뚜껑에 끼는 하얀 얇은 막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누군가는 원래 습한 사람인데 뭔가 조급하고 초조한 상황이 생겨 그렇지 않을까 하기도 한다. 만약 칠정으로 인한 경우라면 비습한 그의 속에 열이 있어 더운데도 오히려 땀이 나지 않는 경우에 가깝다는 부연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당연히 땀이 나면서 속의 열이 해소가 되는데, 그의 경우엔 어떤 과도한 긴장상태에서는 열이 더 갇혀있게 되어 피부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나는 김장철의 가을배추 얘기를 했다. 알이 꽉 찬 배추를 걷고 남은 배춧잎의 더미가 가을의 따갑고 건조한 날씨로 인해 가장 위에 얹힌 잎은 쉬 말라 건조해지면서 밑에 있는 배추의 습기를 오히려 차단해버린 모양 같다고 했다. 물론 인체에 적용하기엔 무리지만 조습이 혼잡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위한 유추로 어떨까 하는 뜻이었는데 반응들은 별로였다. 


조습의 해결책도 또한 기운의 흐름을 원활히 하는데 중점을 둔다. 특히나 비습肥濕한 경우라면 활동을 하여 땀으로 소통하는 게 어떤 치료보다 우선이다. 아니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게 바로 치료다.


초겨울. 농부의 1년 농사는 추위로 끝나지만, 주부는 김장으로 1년 농사 삼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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