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여자와 가벼운 남자(불-통)

#통하지 않는 사람 #결혼 #사랑

by 세시반

불-통(不-通)


삶의 이유를 쫓다 죽음의 해답만 가져오는,

세상이 무겁고 삶이 버거운 여자는

홍대 앞 9번 출구 앞에서

새빨간 트렌치코트 안 새빨간 심을 숨기고


'그냥' 눈 뜨니 사는 거지 '왜'가 어디 있나,

좋아하는 사람들과 개발 족구에 승리의 맥주 한 잔이면 되는 남자는

홍대 앞 9번 출구 앞에서

새빨간 니트에 새빨간 심을 드러내고


단번에 통했고

단번에 알았다

영원한 불통으로

우리는 통하리라


이대로 안으면 다 부서질 거 같아 예민한 여자와

이대로 재밌고 아쉬울 게 없는 충분한 남자의

결코 닿지 않을 것 같은 두 개의 빨간 심


무거움이 가벼움에 닿지 않고

가벼움이 무거움에 닿지 않아

영원히 만나지 않을 무심의 경계


그 균형 안에서 우리는

편안했고

사랑했고

결혼했다





여기저기 찢기고 베이고 긁히고 해진 종잇장처럼, 살갗이 날 선 감정들로 너덜너덜해졌다. 짓누르는 불안과 우울이 온몸을 휘감아 심연까지 잠식되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의미를 찾고 행복을 좇던 가여운 여자는 아무 답도 건져내지 못하고 불행과 행복의 언저리를 넘나들며 자꾸만 스스로를 생채기 내기 바빴다. 버거운 감정에 허우적거리다 가라앉고 있었다.


드넓은 들판에 외로이 홀로 서 있는 나무를 좋아하는 남자는 자기 몸보다 큰 그림자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꼿꼿하게 버텨내는 그녀가 좋았다. 그는 그녀에게 캐묻지도, 엉켜 붙지도 않았다. 대나무 숲을 요하지도 않았으며,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선에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무거움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무심하지 않은 무관함이 편안했다. 그녀의 무거운 세계를 손가락 두 개로 쉽게 튕겨내는 그의 가벼움이 좋았다. 아무렇지 않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녀는 삶에서 조금씩 무게를 덜어냈다.


우아한 백조가 물속에서는 버둥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같이 발버둥 치며 그 버둥거림조차 좋아지게 만드는 백조가 되어주었다. 별거 아니야 삶은 원래 이런 거야 이거 꽤 재밌는데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 온몸으로 말해주었다. 그녀는 비로소 고요해졌다.


행이냐 불행이냐 이분법적 인생에 갇혀있던 그녀에게 우리가 함께하는 길이 늘 꽃길만은 아닐 거라며, 가시밭도 있고 굽은 길도 있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서로가 상처가 되기도 하고 울기도 할 거라며, 그래도 사랑해 보자고 그래도 같이 웃다가 울다가 또 웃어보자며, 그게 인생이고 그게 삶의 진리 아니겠냐며 그녀를 행불행의 굴레에서 해방시켰다.


살갗도 마음도 단단해져 갔다. 웃는 날이 우는 날보다 많아지더니 언젠가부터는 눈물이 아예 증발한 것만 같았다. 생각이 많던 그녀는 그의 단순함을 닮아갔다. 허황된 과거와 미래를 쫓던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현재,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했다. 삶에 충실했다.

그렇게 살아졌다. 그렇게 서른을 살았고 그렇게 마흔을 향해간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라고 사실 삶 따위 별거 없다고 삶의 이유와 존재의 의미를 묻다 보면 그 끝은 죽음에 이를 것이니 그와 함께 더 살고 싶어서 답을 찾지 않기로 했다. 때로는 흘러가는 대로 흐르다 흘려보내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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