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가난했던 건 아닌데 점점 가난해졌다고 했다. 내가 태어났을 땐 이미 가난한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물려받은 재산만 믿고 살았던 한량이었고 아빠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도 무상으로 받았던 재산은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어주었고 자존심 버려가며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아빠와 결혼했던 엄마는 아빠 대신 사회에 나가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 했다. 이따금 학교에서 제출하라는 가사 조사서에는 가족구성원과 소득을 제출해야 했다. 나는 아빠가 그 종이에 쓰던 금액이 우리 집에는 없는 것 같아서 늘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가 제법 머리가 컸을 때는 아빠에게 이게 정말 맞냐고 물었다. 아빠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렇다고 했다.
수명이 다 된 집을 떠나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 번은 건축허가가 나지 않았고 한 번은 옆집 할머니의 떠나지 말라는 간절함에 붙잡혔다. 그리고 몇 년은 원하는 매물이 없어서 나오지 못했다.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집을 고쳐 살았다. 창고처럼 쓰던 건물을 다 드러내고 보수공사를 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사람을 사서 해치웠으면 좋았을 것을 온 가족이 나서서 쌓인 짐들을 드러냈다. 방치되고 썩어간 삶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가구들은 오래되고 삭아서 부서지고 형태를 잃었고 쌓여있던 물건들도 곰팡이 꽃이 피어있었다. 과자처럼 부서지는 오래된 서랍장에서는 쥐가 새끼를 낳았고 눈도 뜨는 못하는 쥐새끼들이 꼬물대고 있었다. 그놈에 쥐새끼... 쥐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고 소름이 돋았다. 한나절 쓰레기 더미와 씨름하고 밤에는 앓았다. 아마도 몸만 힘들어서 그렇게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집을 고쳐 몇 년을 더 살았다.
몇 년 후에 그 집을 정말 이사하게 되었을 땐 정말 돈으로 치워야 한다는 체념에 이르렀다. 고물상에 전화해서 필요한 것들을 가져가라고 말했지만 수십 년 동안 쌓인 물건은 쓰레기가 되어 공간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차마 쥐가 나올까 봐 무서워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몽둥이로 문을 쾅쾅 두들겨도 쥐가 나올까 무서워서 못 들어간다고 울먹였다. 결국 필요한 살림을 정리하고 들고 나오는 것까지만 내 몫의 노동이었다.
집이 후지면 사람들을 초대할 수 없다. 부끄럽고 수치심을 피할 수 없으니까 그런 일은 만들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열일곱 살 까지는 친구들을 불러 엄마가 쫄면이나 떡볶이를 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커갈수록 우리 집이 점점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친구네 집에 다녀오면 우리 집이 초라해져서 그 무렵부터 친구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부터 친했던 친구는 성인이 된 후에 우리 집이 궁금하다고 굳이 오기도 했는데 들키지 말아야 하는 어떠한 것을 들킨 것 같아서 수치스러웠다. 그 친구네 집은 빨간 벽돌집이었는데 그 친구의 집보다 초라한 우리 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집에는 부모님의 손님이 많이 왔다. 엄마는 고정 멘트로 집이 누추하다고 먼저 말을 꺼내 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우리 집을 자주 찾았다. 집은 후져도 사람들이 편하고 공간이 편해서 그런지 먹거리를 싸 들고 밥을 먹으러 왔다. 봄이 되면 집 주변에 온갖 채소를 심어 먹었고 손님이 오면 신선한 채소들을 뜯어다 쌈 싸서 먹고 고추나 오이를 장에 찍어 먹기 바빴다. 그럼에도 엄마는 빨리 이 집을 나가고 싶다고 했다. 사는 게 너무 구질구질해서 진절머리 난다고 이따위 채소들 사 먹으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