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마을 일기 1부. 경주마, 낯선 마을에 가다
9. 나무
결국 언니는 집으로 내려왔다. 형부는 서울서 직장을 다니고 일을 하고 싶다는 언니만 혼자 애를 데리고 느린 마을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재취업에 성공했다. 이 일의 단점은 일정하지 않은 스케줄이다. 로테이션이라는 말로 사람을 밤낮없이 굴린다. 어느 날은 밤에 깨어 일하고 낮에 자고, 달이 바뀌면 애매한 낮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한다. 일하고 싶달 때는 언제고 막상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니 일하는 게 버거운 모양이다.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핸드폰만 붙들고 있다. 자동으로 아이는 내게 매달린다. 나이 든 엄마는 눈으로 볼 때나 좋아하지, 애랑 씨름하고픈 생각이 전혀 없다. 보수적인 남편 챙기느라 바쁜 엄마는 사실 집안일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래서 육아는 자동으로 내 차지가 된다. 일 좀 할라치면 방문을 두드리며 통곡하는 애를 떼어놓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언니는 애 탓을 한다. 내가 애 좀 보라 하면 애가 나한테만 가는 걸 어쩌냐며 불만이다.
나는 어쩌면 저 아이를 내가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실질적 엄마가 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밀려온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친구들에게 하소연한다. 형부는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를 보는지 모른다. 애는 나와 아침을 맞이하고 함께 밥을 먹고 내 도움을 받아 씻고 놀고 잔다. 내 삶 속에 아이가 없는 시간이 없고 아이 삶 속에 내가 없는 시간이 없다. 우리는 모든 시간을 함께한다.
어느 날부턴가 아이는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길을 건널 때도 내게 엄마하고 달려와 안긴다. 제 어미가 우리 아기 누구 딸이냐고 물으면 이모 딸이라고 말한다. 나와 함께한 시간이 엄마와 함께한 시간보다 많아지고 있다는 건 아이에게도 아이의 엄마에게도 위기다.
주변에서 내게 왜 아이를 봐준 거냐며 묻는다. 우는 애를 어쩔 수 없었다 말하지만 실은 그 작은 아이에게서 나는 우리를 봤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나와 언니를 봤다. 허구한 날 싸우시던 부모님과 그 밑에서 밤마다 덜덜 떨던 우리는 부모님이 심하게 다툰 어느 날 심한 충격에 기억 일부를 잃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엄마가 한탄하듯 하던 말속에서 그날의 기억이 우리 둘에게 지워졌음을 알게 됐다.
나에게는 나무가 없었다. 힘들 때 찾아가 쉴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같이 우직한 어른이 없었다. 어른들은 다들 제 삶을 감당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그들에게 나의 어려움을 토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각자가 1인분을 충분히 해내는 것 그게 서로를 위하는 유일한 배려였다.
심지어 그들은 나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내가 모르는 답은 그들도 모른다. 서로가 살아온 시대가 달라서 그들이 풀어본 적 없는 문제가 우리에게 생겨나기도 한다. 그 낯선 질문들은 나에게도 처음이고 그들에게도 처음이라 내 문제에는 늘 답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늘 나무를 기다렸다.
나는 아이를 떠올리며 예전에 본 다큐멘터리 한 편을 떠올린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렸는데 딱 하나가 뇌리에 박혀있다. 3살까지 기억이 한 아이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말이 내 마음을 붙잡는다. 나의 불행도 어쩌면 그 3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고작 3년이 평생을 좌우할 수 있는 거라면 한번 쏟아볼 만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아이의 3년이 아닌 나의 3년은 내게 무엇으로 남는가. 희생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게 왜 내가 되어야만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희생하고 싶지 않다. 그럼 이 아이도 나와 같은 길을 가게 되는 걸까. 후에 내가 구하지 못한 시간의 결과를 나는 과연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 지금 이 상황, 지금 이 상태, 이 기억을 안고 아이가 어른이 된다면 과연 행복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내가 아이를 놓는 순간 아이의 삶은 나와 다르지 않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나무를 떠올려 본다. 그리고 내가 그 나무가 되어줄 수 있는지 생각한다. 나는 나무가 될 만큼 우직한 사람인가. 나의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면서 아이의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가. 사람 하나를 돌볼 만큼 충분히 현명한 사람인가.
나는 아직도 사는 게 버겁다. 수없이 흔들리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실수하고 잘못하고 후회한다. 사는 게 뭔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매 순간 막막하고 두렵다. 그럼에도 나는 3년을 떠올린다. 3살까지의 기억이 평생을 좌우한다면 딱 3년만 할애하자 생각한다. 어차피 내 삶에 희망을 거는 것보다 이 아이 삶에 희망을 거는 편이 더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내가 아이의 나무가 되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