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느린 마을 일기 2부. 익숙한 세상과 안녕

by 이나

1. 걷기


걸어서 등교하는 애들을 뚜벅이라고 불렀다. 나는 뚜벅뚜벅 4년을 걸어 학교를 졸업했다. 그땐 돈이 궁했다. 방학 2달 동안 바짝 돈을 벌면 한 학기 생활비로 살 수 있었다. 학기 중에 일은 삼갔다. 공부 놓치고 푼돈 벌러 다닐 바에 공부에 매진해 장학금을 따내는 게 내겐 더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방학 때 일을 해 봐야 학기 중에 쓸 생활비를 넉넉하게 쓸 만큼 벌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차비라도 아낄 겸 웬만하면 걸어 다녔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제법 거리가 됐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면 가지만 매일 2.7km를 걸어서 가려면 두 배는 걸렸다. 어떤 날은 여유롭게 나와 느긋하게 걷다가 학교 근처에서 죽어라 달려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어떤 날은 평소처럼 천천히 걸은 것 같은데 말도 안 되게 빨리 도착한 적도 있었다. 걷는 게 생활이 되면서 시간은 점점 짧아졌고 마지막 학년 때는 버스를 타는 거나 별반 차이 없는 속도로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짓말 안 하고 30분이면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는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학교를 잘 걸어 다니지 않았다. 버스가 올라갈 때도 버거운 엔진음이 날 정도니 웬만큼 궁한 게 아니고서야 걸어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 같은 애들이 있었다. 그런 애들은 뚜벅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말하는 뚜벅이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중 한 명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내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뚜벅뚜벅 걷는다. 이젠 학교가 아닌 도서관을 간다. 50분 걸리는 거리를 걸어 다닌 전적이 있으니 3.7km는 문제없다. 거리가 조금 늘었지만 이제 1시간 반 정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은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

도서관까지 가는 길은 다행히 평지다. 집이 꼭대기라 돌아올 일이 걱정이지 가는 길은 문제 없다. 오르는 게 힘들지 내려가는 건 쉽다.

걸어 다니기에 여름보다 겨울이 낫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여름보다 겨울이 더 좋아졌다. 추우면 껴입으면 되지만 더운 건 답이 없다. 특히 요즘은 날씨가 미쳐서 빨가벗어도 덥다. 오존이 파괴된 게 맞는가 보다. 몇 년 팔에 선크림 안 바르고 다녔더니 햇빛 알레르기가 생겼다. 햇빛을 보거나 열감이 느껴지면 두드러기가 올라온다. 처음엔 땀이 나서 간지러운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찾아보니 요즘은 나 같은 사람들이 많나 보다. 그 뒤로 나는 쿨링 팔토시를 낀다. 말이 쿨링이지 여름에 쿨링은 쿨링 역할을 못 한다. 오히려 옷을 한 겹 더 입은 갑갑한 느낌이다. 덥다. 나시 위에 아우터를 입을 수도 있는데 아무리 얇은 소재라도 한여름에 뭔가를 더 껴입는다는 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우양산을 쓰고 다닌다. 그나마 우양산이 가장 좋은 선택이 된다. 다만 부피가 커서 걸어 다닐 때 마주 오는 사람들에 피해가 가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과 바람이 불면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점만 빼만 훌륭하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내 옷은 팬티까지 축축해진다. 먼저 물을 몇 잔 연속으로 들이키고 화장실로 간다. 휴지를 둘둘 말아 몸에 난 땀을 대충 닦아낸다. 아침 샤워 후에 로션을 바른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온몸이 미끄덩거린다. 다음엔 촉촉한 로션 말고 알로에 젤을 바르는 게 낫겠다.

화장실을 나오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좀 살 것 같다. 땀이 마르면서 몸이 점점 차가워진다. 아우터 안 가져온 게 후회되지만 어쩔 수 없다. 먼 거리를 걸어오려면 짐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낫다.

나는 너무 두껍지 않은 책 몇 권을 빌려 도서관을 나온다.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일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 일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자주 걸어 다녀도 여름에는 몸이 쉽게 지친다.

도서관 주변에는 과일 가게가 많다. 길에 내놓고 과일을 파는 과일 장수는 내게 어린 애들에게나 할 법한 말을 한다.


“안녕?”


손까지 흔들며 내게 인사를 건네는 과일 장수를 나는 당황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지나간다.

조롱이 아닌 게 분명하니 나를 애로 착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내 나이를 잘 모른다. 보통 내가 서른이 넘었다고 생각 안 한다. 나는 그 비결이 걷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걷는 습관 덕분에 나는 나이를 먹어도 나잇살이 없다. 뚜벅이는 살찌지 않는다.

됐고, 날이 해마다 더 더워지는 것 같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무작정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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