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마을 일기 2부. 익숙한 세상과 안녕
4. 남성 호르몬
여자가 엄마가 되는 순간 여성성은 사라진다. 엄마만 있을 뿐이다. 아이가 생기면 삶의 모든 중심은 아이를 키우고 지키는데 쏠리게 된다. 내 목청은 하루가 다르게 우렁차지고 있고 배짱은 두둑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수줍음도 많았는데 지금은 온데간데 없다. 겉으로 예뻐 보이려 신경 쓰지 않는다. 화장하지 않고 밖을 나갈 수 있다. 추레한 복장으로 집 주변을 배회해도 부끄러움 한 점 없다. 감성이 증발하고 이성이 뇌를 지배한다. 무엇보다 효율을 많이 따진다. 뭘 하든 치울 게 걱정이다. 정리가 어려운 것들은 애초에 사지 않는다. 나보다 아이를 먼저 생각한다. 지킬 사람이 생기면, 못하는 게 없어진다. 대체로 씩씩하고 모든 일을 척척 잘 해내는 사람으로 바뀐다.
동갑내기 사촌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 결혼 소식을 들을 때 가장 큰 스트레스는 복장이다. 결혼식마다 똑같은 옷을 입고 갈 순 없어서 노란색 트위드 원피스 하나를 산다. 사고 보니 치마를 안 입는지 아주 오래됐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치마뿐만이 아니다. 내 서랍장에는 어찌 된 일인지 짧은 반바지도 보이지 않는다. 여름에 쪄 죽어도 긴바지를 고집하게 된 건 과연 진짜 햇빛 알레르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부터 옷을 고를 때 내가 편안한지를 먼저 따졌던 것 같다. 괜히 치마 입고 계단 올라가다가 혹시나 치마 속이 보이지나 않을까 가방으로 엉덩이 밑을 가리는 게 번거롭고 불편해서 치마를 안 입어야겠다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하체를 드러내는 옷들과 나는 자연스럽게 결별했다.
아주 오랜만에 입어본 치마는 내 다리가 이렇게 못생겼었나 하는 실망감만 불러온다. 못생긴 다리는 구두 위에 올라서도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썩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어차피 결혼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나는 여전히 조카를 돌본다. 매일은 아니고 가끔 언니와 형부가 바쁠 때면 조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 언니와 형부는 느린 마을을 떠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나와 자주 못 보는 걸 힘들어하던 조카는 일정 기간 천천히 멀어지는 과정을 거쳐 이제 엄마와 더 가까워지고 있다. 아주 좋은 일이다. 예전만큼 조카와 자주 어울리지는 않지만, 나의 여성성은 좀처럼 돌아올 기미가 없다. 스스로 모든 걸 너무 잘 해내는 내가 좋아져서 그다지 예전이 그립지 않은 건 그나마도 다행이다.
조카에게는 오늘 공주님 결혼식이 있어서 우리가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카의 꿈은 공주님이 되어 멋진 왕자님과 결혼하는 것이다. 공주님을 알현하는 것도 모자라 파티에 초대까지 받게 된 조카는 출발도 하기 전에 들떠서 내게 안아달라 난리다.
점점 덩치가 커지고 있는 조카는 아직도 어릴 때 습관을 못 버린다. 내가 양반다리로 앉아있을 때 내 다리를 의자로 사용하던 습관은 앉은키가 내 시야를 방해할 정도로 커진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다. 이따금 조카는 그 큰 덩치로 내게 냅다 달려오거나 안아달란 요구를 한다. 가능하면 힘이 될 때까지는 안아주고 싶어서 그 말은 되도록 토 달지 않고 들어준다. 못 본 사이 커버린 아이를 나는 이제 쉽게 들어 올릴 수 없다. 들자마자 허리에 무리가 가는 게 느껴진다.
“어, 허리가 이상하다.”
이제 막 결혼식을 가야 하는데 허리가 안 움직인다. 구두 신고 돌아다닐 걸 생각하니 눈앞이 컴컴해진다. 망했다.
“이제 무거워서 안아주면 안 돼. 뭐하러 안아줘? 못 산다 정말.”
나는 결혼식에 갈지 말지 고민한다. 조카는 내가 안 가면 안 간다며 찡얼거린다. 엄마는 그럼 조카와 단둘이 집에 있으라 그런다. 나는 그것만은 안 된다며 반대한다. 아이와 집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는 게 더 수월한 나는 움직이지 않는 허리를 이끌고 결혼식에 가기로 한다.
조카는 내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허리 근육이 뭉쳐 어정쩡한 자세로 결혼식이 시작되길 기다린다. 친척들과 함께 사진 찍는 것도 잊지 않는다.
결혼식이 끝나고 친척들 단톡방에 사진이 와르르 올라온다. 나는 내가 있는 사진만 골라 쏙쏙 사진첩에 저장한다. 나중에 사진을 다시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하……. 나 왜 다리 벌리고 서 있냐…….”
아이를 키우면 여자 몸에서 남성 호르몬이 나오는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