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초록지붕집의 앤』 리뷰 |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P.S. : 현대지성 출판사에서 출간한 [빨간 머리 앤 전집](총 8권)을 읽고 1권부터 리뷰를 다시 씁니다. 1권 리뷰는 예전에 썼던 『GIRL, GROW, GLOW』 연재와 비슷할 수 있지만 2권부터는 새롭게 썼습니다.
출판사: 현대지성/번역: 오수원/그림, 만화: 유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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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봤던 애니메이션 속에 나오는 빨간 머리 앤이 강하게 남아 있다.(물론 애니메이션 한국어 버전 OST도) 공상력 최고치인 앤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나도 이야기 짓기를 좋아했고 상상하기를 좋아했다.
책은 펼쳤을 때만 입체적인 영상을 제공한다. 나는 책 속에 빠져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사는 걸 좋아했고 공주 시리즈는 싫어했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받았던 차별에 대한 반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어린 시절 내 시야가 찻숟가락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장면부터 어찌나 울었는지. 쉬지 않고 재잘대는 앤의 말과 캐나다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이 대조를 이루면서 앤의 상황에 몰입하게 되었다. 결말을 이미 알고 있지만 작가의 문체에 빠져들어서 새로운 이야기처럼 생생한 독서를 경험했다.
이번에 읽은 책은 현대지성 출판사에서 출간한 [빨간 머리 앤 전집](총 8권)이다. 8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53세가 된 앤의 이야기까지 담겨 있다. 『에이번리의 앤』까지가 마지막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전집을 읽으며 앤 시리즈는 상상력이 가득한 아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상력과 진정한 사랑이 개인을 넘어 가족, 공동체, 역사까지 확장되는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평범한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감사한 일인지 작가는 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잔잔하지만 비범한 앤의 삶이 반짝이는 그 이름처럼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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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앤이 상상력이 뛰어난 재미있는 아이라고, 나하고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앤의 상상력은 ‘생존본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어나자마자 고아에, 모두가 자기를 버렸고, 아무도 자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고, 자기와 살고 싶다는 사람이 없었다. 가난한 집들을 전전하며 열 살까지 쌍둥이들을 돌보면서 살아야 했던 어린아이가 비뚤어지지 않은 기적적인 일은 바로 ‘상상력’ 덕분이었다. 상상력이 끔찍한 현실을 긍정의 삶으로 바꾸어주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육사 시인과 윤동주 시인도 너무 끔찍한 현실에서는 차마 눈을 감았었다. 잠시 그렇게 눈을 감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들어가서 삶을 향한 힘을 내어보는 것이다.
앤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기질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세상에 홀로 던져진 어린 앤이 살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바로 ‘상상력’이었다는 점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밝고 순수하고 감정에 솔직한 상상력 소녀 앤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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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아이다. 자신의 상황이 절망적이고 억울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다. 타고난 성향도 있는 것 같다. 난 어릴 때 부정적이었고 분노를 쌓아놓고 살았으며 고집도 엄청 셌다. 그래서 앤을 동경했는지도 모르겠다. 상황에 따라 감정 변화를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앤을 좋아했다.
앤을 받아들인 매슈(윌북, 현대지성 출판사에서는 매슈, 다른 번역은 매튜)와 마릴라도 멋진 사람들이다. 특히 책을 읽으면서 매슈가 어찌나 귀여운지 빵빵 터졌다. 앤을 향한 무조건적인 헌신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매슈의 죽음 장면에서는, 또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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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인 매슈와 마릴라 남매가 앤을 입양해서 키웠지만 앤과 매슈와 마릴라 또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앤의 말을 들어주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간다.
가족이란 핏줄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소피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핏줄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끔찍한 무례와 상처를 반복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범죄는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확률보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질 확률이 높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질투와 시기, 소유와 집착이 사랑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범죄를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앤은 웃어본 기억을 잃어버린 마릴라의 얼굴에 웃음을 찾아주고, 타인과 만나는 불편한 자리나 장소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매슈에게 용기를 준다. 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다. 작가는 매슈와 마릴라, 앤을 통해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그렸다.
앤은 상상과 공상의 차이를 삶을 통해서 깨달았으며, 에이번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연이 주는 친절함으로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11세 전까지 앤을 살아가게 해 주었던 공상이, 초록지붕집에 살면서 상상으로 변한 것이다. 공상을 현실에서 이루어내는 것이 상상력이다. 앤은 공상 속의 친구가 현실의 다이애나보다 못하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물론 상상은 여전히 앤을 긍정적이고 밝고 순수한 아이로 만들었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게 되었으며, 상상으로만 그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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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초록지붕집의 앤』은 당시 캐나다(앤 11세~16세, 1876~1881년)가 어떤 형태로 형성되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앤의 성장기를 통해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시절, 남학생과 여학생을 차별하는 학교나 가정, 여자가 대학에 가는 것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고, 여성에게는 투표권도 없었고 여성이 직업을 갖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또한 ‘남자가 구혼할 때 종교는 여자의 어머니한테 맞추고 정치는 아버지한테 맞’추는 시절이었다고 책에 나온다. 마차를 타고 나무 장작을 때며 상수도는 우물펌프(사람이 손잡이를 상하로 되풀이하여 움직여 그 압력을 이용해 땅속에 수직으로 박혀 있는 관을 통하여 지하수가 땅 위로 나오도록 하는 생활 도구)로 지하수를 사용하던 시절이었고, 전기가 아니라 촛불을 켰던 시대였다. 조선시대처럼 여성의 머리모양으로 나이를 가늠하는 때였고,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었다. 물론 다른 직업군에서도 여자는 자격을 받지 못한 시대였다. 아직은 개발이 덜 되어서 자연이 아름답던 시대이기도 했다.
앤이 밝고 긍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아름다운 자연이다.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해 주고, 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치유해 주는 자연의 힘이 앤을 내면적으로 성장하게 한 것이다.
그러니 빨간 머리 앤을 동화쯤으로 취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소설로써 당시 캐나다의 시대상을 표현하고 있으며,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소설이다. 작가 몽고메리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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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캐나다나 지금의 한국이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를 입양해서 키운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 같다.
수다스런 아이 앤의 활기와 생명력이 매슈와 마릴라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아이들이 있는 집은 항상 웃음이 가득하다. 작은 일에도 행복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성장기를 거치는 시기가 오면 점점 어른들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추억을 잊어버린다. 아이들은 어릴 때 어른에게 이미 행복을 주었기 때문에 사춘기부터는 자기 삶을 살아가면 된다.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였고 그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앤을 통해 그 순수함을 꺼내 보면 좋겠다.
매슈와 마릴라의 헌신
마릴라와 소중한 집을 향한 앤의 사랑
앤을 향한 길버트의 사랑
다이애나의 우정
모두 사랑의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빨간 머리든 주근깨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독려하는 책이다. 앤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이 초록지붕집이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 것처럼 앤은 자신이 걸어갈 인생의 길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초록지붕집이 아니었다면 책에 등장하는 모든 헌신의 모습은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그렇게 느닷없이, 예기치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행과 불행은 그때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렸다. 기꺼이 선택하고 책임을 지는 태도는 인생을 불행하게 하지 않는다. 회피하고 의존하고 남의 탓을 하는 태도는 주도권을 스스로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앤처럼 당당하게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직선도로만 좋아하지 말고 길모퉁이에 서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상상하는 것, 인생은 그곳에 선물을 마련해 두지 않았을까.
우리 안엔 모두 앤이 있다. 그 앤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초록지붕집의앤 #빨간머리앤 #루시모드몽고매리 #캐나다
✍ 다음 연재 – 윤동주 시인 초판본 시에 대한 단상, 브런치북 『나는 지금, 그의 시에 답하려 한다』 열한 번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