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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Mar 21. 2021

박남선, 5·18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


1. 평범했던 삶을 뒤흔든 '그날'


 박남선은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한국 나이로 스물일곱 살이던 1980년에는 이미 덤프트럭 20대를 가지고 골제 납품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의 삶을 이어가던 그에게도 '그날'은 왔다. 그것은 순전히 그가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그날도 광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18일, 어느 때와 다름없던 그날, 급한 연락이 왔다. 그의 동생 박남규가 계엄군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여 갈비뼈와 다리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는 충격적인 연락이었다. 그는 전대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동생이 죽음의 문턱 앞에 있었다. 분노한 박남선은 그 길로 항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날 항쟁에 뛰어든 사람들은 그뿐만 아니었다. 계엄군의 폭력을 목도한 수많은 시민들이 그와 함께 거리에 나서기 시작했다. 박남선의 동생 박남규는 다행히 고비를 넘겨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박남규가 계엄군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은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5·18 당시 전남매일 기자였던 나경택의 카메라에 박남규가 계엄군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이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5·18을 대표하는 사진 중 한 장이 되었다.

 

나경택 촬영, 박남규와 계엄군


 5월 18일 당일부터 박남규는 3일간 앞장서 항쟁에 참여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은 비무장 시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금남로에 있던 박남선은 겨우 가톨릭 센터 골목으로 몸을 피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총을 들기 시작했다. 그는 전라남도 나주에 위치했던 영산포 경찰서로 가서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5·18 당시에는 각 경찰서 무기고에 칼빈소총을 비롯한 소화기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경찰병력들이 대부분 광주로 차출되어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찰서에는 당직자 1명만이 상주하고 있었다. 박남선이 상황을 설명하고 무기를 달라고 요구하자 경찰관이 순순히 무기를 넘겼다. 광주시민들이 무기를 들자, 계엄군은 즉각 광주에서 철수했다. 해방광주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기뻐했다.


 그러나 계엄군 철수 직후 5·18을 수습하기 위해 결성된 시민수습대책위는 화전양면의 갈등 상황에 놓인다. 소위 매파와 비둘기파의 대립이었다. 화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크게 잘못된 점은 없었다. 그들은 희생을 줄이자고 했다. 하지만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았던 이들은 결코 총을 내려둘 수 없었다. 5월 25일을 기점으로 도청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이에 지역사회 명망가들이 자의로 무기회수를 결정하고 이를 강행하고자 했다. 분노한 박남선은 도청 2층에서 열리는 회의에 들이닥쳐 권총으로 공포를 쐈다. 윤석루, 윤상원 등도 함께였다. 이들은 이미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것을 맹세한 이후였다. 무기회수를 주장했던 김창길 등이 도청을 떠나자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도청에 남은 이들은 '도청항쟁지도부'를 구성했고, 박남선은 상황실장을 맡았다.


2. 시민군 '상황실장'


 당시 광주시민들은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이 항공모함 미드웨이, 코럴시호를 파견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시민들은 민주 우방의 압박으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밀려날 것이라 생각했다.


 한편, 인간미가 느껴지는 에피소드도 있다. 5월 26일 시민군이 지금의 광주 서구 광천동 부근에서 군인들과 맞닥뜨려 한 명의 군인을 체포했다. 그는 상무대 급양대 소속 김기범 병장이었다. 시민군은 그를 차에 태워 도청에 데리고 왔다. 박남선 상황실장은 떨고 있는 김기범 병장을 식당에 데리고 가서 밥을 먹였다. 이후 행정 전화로 상무대에 연락하여 차에 태워 그를 보내주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김기범 병장이 총을 잃어버린 사실을 이야기하자, 총을 잃어버리면 혼나는 걸 알았기에, 무전기로 총번을 안내하여 총까지 찾아주었다. 박남선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서 평범한 청년에 불과한 군인에게 적대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민들을 학살한 원흉은 권력을 강탈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였다.


 이날, 계엄사령부에서 자정까지 도청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최후통첩이 왔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도청에 남았다. 죽음으로써 광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오늘 저녁 전투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시민들의 생명을 지키고 싶은데 우리와 함께 하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박남선은 도청을 돌며 시민군과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가 서로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지만, 차마 떠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초기 시민수습대책위를 구성했던 광주의 명망가들과 지식인들은 도청에 남지 않았다. 그 새벽 유일하게 이종기 변호사가 도청으로 왔다. 그는 "집에 가서 목욕하고 왔소. 자네들과 함께 죽음으로 도청을 지키겠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광주 서구 화정동으로 탱크가 밀려왔다. 박남선 상황실장은 무전으로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하는 역할이었다. 상황은 점차 악화되었다. 광주 전역에서 시민들이 죽어나고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도청에 집결하여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모두가 숨 죽인 그 시간, 도청에서 마지막 방송이 시작되었다. 도청 1층 방송실에 남아있던 박영순의 목소리가 광주 전역에 울려 퍼졌다. 방송이 끝난 직후 계엄군 3공수여단이 도청 후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건물 2층에 있던 박남선은 군인을 보고 즉시 엎드렸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M-16 총탄이 발포되었다. 박남선은 계엄군에게 체포되었다. 도청 전투가 끝난 직후 소위 '지도부'의 역할을 수행했던 이들은 보안사 지하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3. 상무대에서 겪은 고초


 박남선은 보안사와 상무대를 거치며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때 급양대 사령관이 빵과 간식거리를 가져다준 일이 있었다. 김기범 병장을 풀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러나 당시 상무대의 고문은 차마 언어로 모두 기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박남선은 반란을 이끌었다는 혐의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군사반란의 수괴 전두환이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직후였다. 박남선은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판결이 있던 1981년 3월 31일 '사형'의 중압감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 지었다. 이 소식을 들은 5·18 구속자 가족들은 그 길로 명동성당에 갔다. 그들은 미사가 끝나자마자 무대로 올라가 광주의 진실을 호소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가 전두환을 만나 사형 만은 면해줄 것을 호소했다. 1981년 4월 3일 전두환이 5·18과 관련하여 사형을 선고받은 3명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박남선은 1982년 12월 25일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2017년 2월 박남선 씨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1980년 그날처럼 평범한 사업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다니고 있는 대학을 묻는 그에게 학교와 과를 이야기하자, '내 아들도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다닌다며 반가워했다. 여전히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그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주도했던 5·18 민중항쟁이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음을 생각해보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글이 쓰이기까지.


지난 2016년, 5·18 당사자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전하는 팟캐스트 방송 '오.광.팟 (오늘의 광주 팟캐스트)'이 송출되었다. 방송 진행자로는 필자와 함께 안종철 전 5·18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장과 5·18 당시 전남대 학생운동가 지병주 선생이 참여했다. 당시 방송은 20회까지 진행되었으며, 정현애(5.18 당시 녹두서점 활동), 안성례(5·18 당시 기독병원 간호감독), 박남선(5·18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전용호('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저자), 박영순(5·18 마지막 방송 진행자), 이윤정(5·18 당시 YWCA 간사), 김태찬(시민군 기동타격대 7조 조장) 등이 출연자로 참여하여 5·18 당시 직접 겪었던 생생한 경험들을 증언했다.


얼마 전, 필자는 다시 한번 해당 방송들을 청취해봤다. 당사자분들의 살아있는 증언에는 여전히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러나 4년이라는 시간과 '음성 매체'라는 한계가 맞물려, 이제는 해당 방송에 접근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에 필자는 방송 내용을 '텍스트'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구글링만으로 그분들의 증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이 자리를 통해 오.광.팟 진행에 도움을 주신 여러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특히 출연자 섭외에 힘쓰셨던 존경하는 안종철 박사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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