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어 평양>,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양영희 감독의 평양 연작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오늘은 양영희 감독의 <디어 평양>을 봤다. 재일 조선인 2세인 양 감독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 두 편의 영화를 찍었다. '평양 연작'이라 불리는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이다.
전쟁과 분단 과정에서 한반도를 떠나 일본에 정착한 이들은 대부분 남한 출신이었다. 그러나 재일 조선인(일명 자이니치) 과반수의 정치적 선택은 북을 향했다. 북의 끊임없는 구애와 당대의 정치 상황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이니치들에게 북은 진정한 조국이 됐다. 그들은 북에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걸었다. 자이니치들의 빈곤한 삶은 고스란히 조총련 운동의 동력이 됐다. 소련의 영향으로 급속히 발전하던 북의 경제를 보며, 자이니치들은 북에서의 삶을 동경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4.3사건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가까스로 섬을 빠져나온 양 감독의 어머니와 조총련 활동가였던 아버지는 양 감독을 제외한 자신의 아들 셋을 북에 보냈다. 마치 한반도가 분단된 것처럼, 세 오빠는 북에 갔고 양 감독만 남(일본)에 남았다. 상당한 시일이 흐른 후, 오빠들의 근황이 담긴 사진과 편지가 왔다. 너무도 마른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그 사진을 아버지에게 보이지 않고 처분했다.
양 감독이 재학한 일본의 조선학교는 "사람의 인생은 조국에 바쳐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일본에서 북한식 교육을 받으면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양 감독은 자기 인생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았다. 이것은 일본에서의 삶과 북에서의 삶의 자연스러우면서도 근본적인 차이였다. 그의 오빠 건오는 비틀즈와 베토벤의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나 당시 북은 서양음악을 금지하고 있었다. 시일이 흘러 클래식 음악에 대한 금지가 풀리자 양 감독은 건오에게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담긴 CD를 보내곤 했다.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오빠들과 양 감독의 삶은 달라졌다. 특히, 자유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 큰 차이가 생겼다.
북을 선택한 사람들과 남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 역시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오늘날 북의 1인당 GDP는 650여 달러에 불과하지만 남의 1인당 GDP는 3.5만 달러에 달한다. 오늘날 북의 경제규모는 남의 1.7% 수준에 그친다. 오늘날 남과 북 모두에 억압과 빈곤, 자유와 번영이 상존하겠으나 북에는 한없는 억압과 빈곤이 남았고, 남에는 상대적으로 튼실한 자유와 번영이 남았다. 이 모든 것들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한순간의 선택에 의해 좌우됐다. 남과 북 중 어디를 택하느냐, 소련과 미국 중 어디를 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오늘날 남이 이토록 번영하고 있는 이유는 분단에 있다고 생각한다. 분단은 오늘의 한국에 거대한 번영을 안겨줬으며 이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단독정부가 없었다면, 여순사건이 없었다면, 미국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이 이처럼 잘 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번영의 그림자에는 늘 그렇듯 남겨진 사람들이 있으며 영화 <디어 평양>에는 바로 그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 영화는 지난 역사가 남긴 짙은 그림자를 가장 서정적인 방식으로 남겨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감독이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일상에 스며들며, 자연스레 '내가 저 삶을 살았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져 봤다. 양 감독이 만든 <수프와 이데올로기>도 잘 봤다. 오늘 <디어 평양>을 본 김에 <굿바이 평양>도 보고, 양 감독이 쓴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도 읽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