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그의 명복은 빌어줄 수 없다
부산 최대 범죄단체인 칠성파 두목 이강환씨가 사망했다. 그에 대해 생각해 보면, 조갑제 기자가 쓴 '히로뽕 지하제국 탐험기'가 떠오른다. 그 기사에는 부산의 마약사범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이강환씨에 대한 언급은 두 번 나온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부산 밀수 조직의 참여로 '히로뽕 산업'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원료 조달 체제를 확보함으로써 그들은 일본 폭력단에 대한 종속적 위치에서 벗어나 대등한 또는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중략) 히로뽕 세계에 뛰어든 밀수 조직은 원료 루트뿐 아니라 대일 밀수출 루트도 여러 갈래로 개척했다. 대일 외항선과 대일활선어 수출선들이 한-일간 벨트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일본으로 하얀 가루를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밀수 조직은 부산의 조직 폭력배들도 같이 끌고 들어갔다. 부산의 2대 폭력단인 칠성파, 20세기파를 필두로 폭력배들은 히로뽕 밀매, 알선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들은 부산에 자주 들리는 일본 폭력단의 말단들과도 긴밀히 접촉, 히로뽕 판매망 확충에 일조하고 있었다. 어느 폭력단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부산폭력단은 결코 의협으로 지탱되는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돈줄로 유지되는 하나의 경제 단체이다. 이강환씨가 연약하고 불편한 몸집으로도 칠성파의 괴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돈줄의 확보에 성공했기 때문이며 그 돈줄은 바로 히로뽕에서 나오고 있었다."
"부산항 밀수 인맥의 히로뽕계 진출은 조직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세성을 면치 못하던 초창기의 조직은 기업화, 대형화되고 정치력까지 발휘하게 되었다. 부산항 거물 밀수 조직의 장점은 일부 단속 기관원들과 밀착할 수 있는 정치력이었다."
한때 한국언론에는 광주 동구 지산동에서 태어난 조양은의 양은이파와, 광주 북구 서방시장 일대에서 성장한 김태촌의 범서방파, 이동재의 OB파 등을 묶어 3대 패밀리라 부르던 이상한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언급된 조직들의 근황이나 최후를 보면 역시 결국 중요한 건 경제 문제였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 징용을 가 필로폰 제조법을 습득한 장인들을 중심으로, 유통업자들과 조직 폭력단이 결탁해 부산을 중심으로, 오묘한 3각 무역 구도를 만들었다. 이로써 종속적으로 마약을 제조해 일본에 넘기던 구도를 넘어, 제3국에서 원단(마약의 원료)을 입수해 한국에서 제조한 후 일본에 팔아 넘기는 형태의 기이한 무역이 형성됐다. 이 3각 무역의 중심에 이강환의 칠성파가 있었다.
식민본국에 대한 열등감 탓에 "일본에 마약 파는 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한 관계 공무원들의 인식은 이들의 활동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일본은 1970년대 들어 밀조범 및 밀매범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펼쳤다. 이후 한국 폭력단 및 밀매범들은 국내로 눈을 돌렸다. 이강환씨의 부고 기사에 등장하는 일반적 언급에 따르면 "(칠성파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가라오케, 나이트클럽, 유흥주점, 필로폰 밀매 등에서 거둬들인 돈을 바탕으로 서울 등지로 진출했다".
한때 언론에 자주 언급되던 광주 출신 폭력단과 이들 부산 폭력단 사이에는 특기할 만한 도덕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의리나 의협 같은 언급은 조갑제의 말처럼 실상을 가리는 기만이다. 핵심은 수익구조이고, 돈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들이 나고 자란 환경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각해 보면 사회운동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흔히 벌어지곤 한다. 우리는 모두 김길오 아저씨를 알지 않나. 이상 이강환씨의 부고를 듣고 떠오른 단상을 적어 봤다. 그로 인해 부산교도소의 향방(마약사범들이 모인 방의 은어)을 오갔을 수많은 평범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아쉽게도 그의 명복은 빌어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