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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Mar 03. 2022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책 이야기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안다고 하는 사실은 진짜 나인 걸까? 나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라고 생각하며 나인 줄 알고 살았다. 그것이 내가 만들어낸 혹은 내가 정의한 나라는 건 30대 이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라는 착각에 빠진 만큼 타인에 대한 시선도 그 타인이 타인이 아닌 내가 생각하고 판단한 타인의 모습일 뿐이었다.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판단한 오류는 타인을 아는 것에도 역시나 오류 투성이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허지원


내가 나인 줄 알고 살다가 그렇지 못한 나를 발견하게 되면 그거만큼 당황스러운 게 없다. 진짜 나를 받아 드릴 것이냐? 나인 줄 알고 사는 나를 그대로 고수할 것이냐! 선택은 언제나 스스로의 몫이다. 그리고 선택에 대해서 인정하고 살면 그만이다. 내가 나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탓할 이는 그 누구도 없다. 다만 내가 나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어느 순간 자신에 대한 혼란만 잘 정리하면 그뿐이다. 그 혼란에 허우적거리며 비틀거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보이는 것이 많고 우리를 자극하는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로 온전히 살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존감 하나만 보더라고 그렇다. 한동안 그렇게 온 매체가 자존감을 떠들던 때가 있었다. 이 자존감은 성인뿐 아니라 육아 관련해서도 많은 책과 전문가들의 이야기로 아이 키우는 부모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 물론 지금도 그 혼란의 시기를 겪는 부모도 분명 있을 거다. 


부모 자존감이 곧 내 아이의 자존감이라는 진리처럼, 자존감 관련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진리들은 넘쳐나고 그 진리 속에서 답을 찾기 못한 이들은 허우적거리며 그것을 붙쫓기 바쁘다. 그 와중에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이라면 자존감에 대한 저자의 명쾌한 확언이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나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세상이 떠들어 대는 것에 마음이 쏠리고 그것이 전부인양 마음을 뺏겨버리면 나는 저만치 달아나고 나라고 생각하는 것 혹은 나였으면 좋은 것들로 우리는 스스로를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자존감이 마지 온몸에 무언가를 걸치는 양 소비구매 충동이 걸리기도 하고 전혀 쿨하지 않은 마음은 숨긴 채 세상 젤 쿨한 척 얼굴에 쿨함을 덕지덕지 칠하며 집에 가서는 이불 킥을 날리며 한탄을 일삼기도 할 거다. 이게 과연 진정한 자존감일까? 그것이 허상이라는 걸 우리는 알지 못하는 걸까?


나에 대한 시작은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생기기 시작하면 서다. 지금 생각해 보자. 얼마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살고 있는지 말이다. 나를 찾는 사람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라는 허상을 짊어지고 나인 줄 알고 사는 이는 절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착각의 늪에 빠져 오만한 얼굴을 거울 속에서 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는 이에게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 속에서 오만함은 찾기 힘들다. 스스로에 대한 답을 찾은 여유와 당당함은 있을지언정 말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스스로 잘난 줄 알고 고개를 쳐들고 살거나 자신의 못남이 자꾸만 들춰져 그 못남을 채우려 온갖 정신적인 질환을 떠안으며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애타게 삶을 살아가는 것, 딱 두 부류일 것이다. 


나 스스로는 그 양극을 왔다 갔다 한다. 기본적인 근자감은 나를 떠받치고 있지만 완벽주의, 불안, 이상적 자기, 죄책감 내지 수치심으로 한순간도 마음 편할 길 없이 그것들을 쳐내느라 마음이 바쁜 채로 살아내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얻은 위안이라면 그러고 살고 있는 나를 위한 저자의 뼈 있는 인정이다. 괜찮아, 그렇게 살아도 돼. 챕터가 끝나고 한 마디씩 덧붙이는 저자의 위로 아닌 위로 같은 단호한 표현은 내가 미처 나 스스로에게 해주지 못하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짐작해본 건데 저자도 꽤나 스스로를 찾는 여정이 고될 것이다. 그 고됨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그 고됨의 강을 건너는 이에게 기꺼이 밧줄을 넘겨줄 수 있는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나 '행복한 인생'이라는 프레임은 우리를 정서적으로 피로하게 만듭니다.
'네 삶에 무슨 의미가 있어? 라든지 '넌 행복해?'와 같은 질문들은 멀쩡하게 잘 지내던 우리를 갑자기 불행하게 만듭니다. 


도처에 우리의 삶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들이 깔린 세상이다. 자꾸만 나의 행복이나 성공, 그리고 이제는 더 가서 기여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들쑤신다. 유토피아같이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은 그것도 모자라는지 정신의 유토피아까지 점령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몸과 마음 전부가 피로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도는 오직 하나, 나를 아는 것이다. 나를 모르고는 진정한 유토피아를 꿈꿀 수 없다. 삶이 힘들고 버겁다 느끼거나 마음의 충만함을 느낄 수 없이 허전하다면 분명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을 것일 테다. 


여전히 세상 속에 살고 있고 또 여전히 살아남아야 하기에 나 또한 진정한 유토피아와 허황된 유토피아 사이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갈등이 일어난다. 그 갈등을 부여잡고 씨름하며 골머리를 앓기도 하지만 결국 남는 건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처한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을 것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거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삶을 살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 
적어도 하루에 두 끼의 밥을 챙겨 먹고 하나 정도의 취미를 가지고 
일과 사람을 심플하게 사랑하는 정도로 노력하면 그뿐입니다 
굳이 완벽할 필요가 없는데도 부러지기 직전까지 완고하게 버티거나  
휘둘릴 의무가 없는데도 그런 역할을 꿋꿋이 해내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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