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엄마의 대명사다. 엄마가 되는 순간 불안은 엄마와 짝을 이룬다. 그 불안은 자녀가 큰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엄마는 불안과 짝하며 불안하려고 엄마가 된거 마냥 그렇게 평생을 살아간다.
얼마전 한 학부모와 면담 후 엄마의 불안이 누군가에게 투사가 되는 걸 감지했다. 엄마의 불안은 비단 아이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걸 크게 깨달은 날이다. 아이에게 투영되지 못하는 불안은 아이가 아닌 다른 대상에로 옮겨간다. 보통은 가장 만만한 남편이나 자녀일텐데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가 될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아이를 맡긴 기관이나 선생이라는 걸 말이다. 대체로 스스로 갑이라 여길경우에...
불안이 투사되는 경우 엄마 스스로 불안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체로 자신의 아이를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무언가 불안 요소가 어딘가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니 그 빛을 다른쪽으로 돌려버리는 꼴이다. 엄마와 아이에게 전혀 좋지 않은 방향임은 물론 그 반사된 빛은 엉뚱한 곳으로 비춰져 엄한 사람만 눈이 부시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럴 경우가 가장 최악이다. 남의 불안을 떠안은 타인이 그 불안을 감당할 이유가 전혀 없고 그 타인 역시 표면적인 부당함에 엄마와 아이에 대한 부정적 시선만 쌓일뿐 결국에는 서로에게 전혀 득이 되지 않는 꼴로 마무리 될 뿐이다.
그 빛을 떠안은 자로서 나는 궁금했다. 그 엄마는 과연 선생에게 무엇을 원했던걸까? 그리고 개념없이 자신의 요구를 당당하게 떠드는 자신감은 무엇일까? 스스로 갑이기 때문?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불안이다. 그 엄마의 불안은 정처없이 떠돌다 엄마 스스로 투사할 만한 곳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걸 내가 받았고 말이다. 단순히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라 여겼다.
그 엄마가 궁금했다.
자신은 아이가 셋이라며 나에게 자신의 상황까지 이해를 바라는 그 엄마를 말이다. 내가 아이가 셋이었기 때문일까? 그렇다. 나도 아이셋을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셋을 키우는 그 엄마의 행태가 너무 못마땅했다. 자신의 환경이나 처지를 왜 때문에 당연시 여기며 누군가에게 강요적으로 배려를 요구하는지 말이다.
아이셋을 키우는 나에게 비춰 그 엄마를 살펴보자면 자신의 처지나 아이들에 대한 여러가지 심적인 불안을 고스런히 떠안고 있는 것이다. 아이셋 키우는 엄마라는 정체성에만 매달려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가지 것들의 부담이 지워진 고달픈 육아에 누군가 자신의 처지를 떠받들어 주거나 거들어 주길 바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돈을 주고 아이를 맡긴 입장에서 그 요구는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다. 단순히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에게 자신의 처지까지 떠안아 주길 바라는 그 마음을 말이다.
문자와 대면으로 이야기를 나눈 엄마는 안정되어 보이진 않았다. 안정인척 아이를 굉장히 위하는 엄마인척 문자를 보냈지만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 엄마의 모습은 모순을 떠안고 있었다. 그 모순덩어리를 떠안을 이유가 없는 나로서는 원리원칙을 주장할 뿐이고 그 말은 공기중에 흩어질 뿐이다.모순으로 똘똘뭉친 자에게 아무리 맹자왈 거려도 그저 소 귀에 경 읽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말에 힘을 실기 위해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살짝 던져보지만 여전히 그 모순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모순을 누군가 해결하거나 떠안을 이유가 전혀 없기도 하지만 그렇게 떠안긴다고 하더라도 그 엄마는 또 다른 모순을 상대에게 넘길 것이다. 이미 나에게 두번의 모순을 강요했으나 전혀 자신의 모순은 통하지 않았다. 과연 그 다음 그 엄마는 어떻게 나올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그 엄마의 행태가 해석이 되지 않았을때는 그저 개념없는 엄마를 하필 상대해야 하는 것에 피로감이 몰려왔는데 아이셋이라는 공통점때문인지 그 엄마의 마음을 살피기 시작한 이후 나는 또 다른 영역의 해설을 가지게 되었고 비로소 글로 풀어낸 후 그 엄마를 수용할 그릇이 키워졌다.
여전히 갑작스런 상황에서는 내 원래의 성정이 발동하기에 그 이상을 나가지 못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이 아직은 일직선이 아니다. 구비구비 돌아가며 결국에는 마음으로 이해를 품으며 그렇게 사람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키워간다.
엄마의 불안은 불안한 엄마만이 알아본다. 그 불안의 길을 걸어봤기에 그불안의 근원을 알수있고 또 이해할 수 있다. 부디 그 엄마가 아이셋 자녀를 위해서라도 스스로 그 불안을 떠안아 불안과 짝만 하는 것이 아닌 사이좋은 관계로 발전하길 바래본다.
불안은 없지 않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불안을 내 마음안에서 얼마나 감당하며 풀어내느냐가 관건이다. 불안과 짝하며 사는 이 시대 엄마들이 부디 불안에 잠식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불안의 잠식은 곧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