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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Mar 10. 2023

진주서평 치유의 글쓰기



     

글을 써야하는데 글을 안쓰고 있으면 이상하게 글쓰기 책이 보고 싶어집니다. 동력을 받기 위해서일까요? 아쉽게도 글쓰기 책을 두권째 보고 있는데 처해진 현실이 녹록치 않아 글쓰기가 잘 되지 않습니다. 책은 매일 보고 있지만 아웃풋을 낼만큼 정신적 에너지를 쓰고 있지 못함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글쓰기는 정신적 활동이 분명합니다.



치유의 글쓰기


글을 쓰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우선적으로 말로 내뱉지 못하고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것들이 어느새 무장해제가 되어 어딘가에 쏟아내지 않고서는 못배길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는 어디라도 토로하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당도한 감정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할때도 글을 쓰게 되는거 같습니다. 저는 후자에 속해서 시작한 걸 전자로 옮겨간 사람입니다. 배설물 같은 감정의 응어리를 글자로 옮겨놓고 보니 어느새 그 배설물같은 감정을 읽어내려가는 글자로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배출한 것을 재사용하게 된 것이라 할까요? 혹은 배출한 것의 실체를 파헤치는 작업도 될거 같습니다. 


치유의 글쓰기



순간적으로 휩싸인 감정을 살펴보지 않으면 그 감정의 실체는 온데간데 없이 그저 감정이 남기고 간 찌꺼기만 상흔으로 남습니다. 더군다나 잠시 스치고 간 감정은 다시금 스치고 온다고 해도 바람처럼 지나뿐 아무런 결정체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저 바람에 따라 술렁일 뿐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매순간 술렁이는 바람같으면서도 우리는 그 감정에 대해 자세히 들려다 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 술렁임이 작아서일까요? 작고 큰 것에 상관없이 그 술렁임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을 어딘가에 적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글을 쓰게 만드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처럼 자신의 뒤틀린 감정을 낚는 글어부입니다. 글을 낚는 것 뿐 아닌 자기 자신을 낚으므로 자신을 살피게 되는 것이지요.



치유의 글쓰기



글을 쓴다는 것은 감정의 나침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글은 감정의 방향을 알려주고 그 방향대로 마음이 영유하도록 도와줍니다. 사실 삶은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오르락내리락 들끊는 감정에 우리의 삶이 줄다리기를 하니 말입니다. 그 줄에 그저 끌여당겨지는 것과 그 줄을 잡고 이끌어내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감정이 팽팽할때는 줄을 느슨하게 잡아도 좋고 감정적 격정이 필요할 때 내 의지로 확 잡아당겨도 됩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게 되는 의지력을 키우게 되면 말입니다. 주어진 환경이나 타인으로 인해 감정이 조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나는 내 느낌들을 전에 일어났던 어떤 일이나 과거와 연결지어 분석해 보았다 
이제 나는 나의 느낌과 삶의 이야기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이 느낌을 다르게 간직하기 위해 언어로 그것들을 변형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또한 글쓰기를 할 때 그것이 나에게 자양분을 공급해 준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치유의 글쓰기



글을 쓴다는 것은 지옥같은 자기삶에 직접적 구원의 행위입니다. 구원을 당하는 것이 아닌 자기구원을 자기 스스로 이뤄내는 것입니다. 자기구원의 확신은 어떠한 것보다 명료하고 정확합니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 나를 구원해 주거나 구원당하길 바라며 수동태적 삶을 살게 됩니다. 수동태적 삶은 실체가 없는 피상적 실체에 가깝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까요? 생애 무언가를 이루어낸 사람은 절대적으로 피상적이지 않습니다. 직접적이고 명확하며 구체적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획득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게 행할 수 있고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능동태입니다.  


글쓰기는 우리의 개인적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삶의 방향을 모를 땐 책을 읽고 삶의 방향키를 쥐고 싶다면 글을 쓰면 됩니다. 글을 쓰기 전에 책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읽거나 쓰지 않고서는 자신을 읽어내거나 써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아가거나 알아낸다는 것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해 스스로에게 말하는 이야기들의 축적물이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를 바꾼다는 것은 
우리 개인의 역사를 바꾸고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가 과거를 검토하고 재편한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관점을 바꾸기 위해 글쓰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개인의 역사를 재편하는 작업의 일종인 글쓰기는 자기생을 거부하거나 혹은 외면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기 생 앞에 두려움을 마주하는 용기이자 도전입니다. 자기를 파괴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자기 파괴적 행위에 대한 고찰을 위해 글을 쓸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글쓰기는 
수용,진정성,깊이와 평온을 불러오는 관점의 변화, 
그리고 진정한 치유의 보증인 지혜를 성취할 수 있게 해준다


저의 첫 글쓰기는 도저히 수용되지 못할 제 삶에 대한 한탄이었습니다. 자기 삶을 살면서도 자기로 살아가는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하지 못하니 삶이 짐짝같았습니다. 그 짐짝을 어디에도 내놓지 못하고 등에 매단채 고행스런 매일을 지난 기억이 아직도 새록합니다. 내가 나조차 읽어나갈 수 없을 그쯤 문장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그림책은 나를 알아채고 나를 읽어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림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지금은 책을 통해 나를 읽어가고 나를 써나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기성찰을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치유의 글쓰기


글쓰기의 최초 실현은 자기 구원이자 자기 구제입니다. 저에게 글쓰는 자기 구제에 가깝습니다. 겪게 되는 일이나 처해진 환경 그리고 주변인으로 인해 불거지는 내적 상흔은  적절한 수용점을 도저히 찾지 못한채 생채기만 내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 상흔은 죄책감으로 불거지며 자기비난을 떠안게 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 자기비난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던 건 내 안의 상흔을 읽어준 수많은 문장덕입니다. 나를 읽어주니 나를 읽어내고 나를 써나갈 힘까지도 얻게 된것이죠. 


치유의 글쓰기



글을 쓴다는 것은 사진을 찍듯 자기를 남겨둡입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는 다르지만 같습니다. 잊고싶은 과거의 나를 잊는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지워버리고 싶은 흔적은 오히려 흔적을 남김으로서 애도의 시간을 통해 수용하면 됩니다. 그렇게 과거의 나를 통해 현재의 나로 옮겨가며 미래의 나를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제 이야기에는 과거의 대한 미련이 참 많이 나타납니다. 미련스런 과거를 잊기 위함이 아닌 미련스럽게 내안의 달라붙어 있는 아쉬운 과거를 글로서 애도하며 자연스럽게 현재로 흐를 수 있도록 글로 남기는 것입니다. 



<치유의 글쓰기>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여러 작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생애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을 경험하게 되면서 받은 상처로 인해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할거 같은 자기를 글쓰기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고 그 구원의 길은 자기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닌 상처받은 또 다른 영혼의 구원 통로가 되어줍니다. 겪게 되는 아픔과 상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품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설명되지 못하고 도저히 이해받을 수 없을거 같은 아픔을 떠안고 살아간다면 비슷한 아픔을 겪어낼 그 누군가를 위해 글품을 품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쓰기는 자기구원이자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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