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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Nov 11. 2023

진주서평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지금까지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하고도 개운치 않았던 것이 한강 <채식주의자>와 손원평 <아몬드>였는데 오늘 서평으로 쓸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이 추가되었습니다. 고구마 100개 먹은 듯은 답답함의 소설이었던 <82년생 김지영>도 있었는데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고구마 200개와 소화되지 않은 더부룩함까지 얹어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소설이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이지만 그 현실에 반하는 반도덕적인 인물들 때문인지 반도덕적이지만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이기에 그들의 폐륜에 가까운 행위가 더 자극이 되는 것이었을까요? 어제 단숨에 소설을 읽고 개운치 못한 마음이 그대로 서평에 녹아내릴까 싶어 하루 지나 글을 쓰지만 여전히 답을 모르겠습니다. 


11월 책읽수다에서 선정한 책이고 마침 읽어보려고 사둔 책이어서 기꺼운 마음이었는데 단순히 돌봄과 간병의 이야기라고만 알고 있던 저에게는 무방비 상태로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라 읽는 내내 구토처럼 올라오는 한숨은 덤이었습니다.




간병이 어렵고 힘든 이유는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저희 시댁에서는 시어머니의 하반신 마비로 인해서 24시간 간병을 해야 하는 처지에 계시고 저희 친정엄마는 치매를 앓고 있는 구순 가까운 할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시어머니 같은 경우는 시누네에서 시아버지와 같이 간병을 하다 시누의 남편인 고모부와의 사이가 문제가 생기면서 결국에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시누네 근방으로 거처를 옮겨 시아버지가 간병을 하시는 것으로 우선은 마무리가 지어졌습니다. 사실 투병생활이 이어진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간병의 직접적인 어려움보다는 간병으로 인해 가족 간에 불거지는 감정적 트러블이 가장 문제였습니다. 그로 인해 서로 사이가 틀어진 것은 물론이고 말입니다. 


저희 친정엄마 같은 경우도 할머니가 치매로 인해 혼자 거주하시는 것에 대한 어려움으로 지방에서 올라오셔서 자녀들 이집 저집 기거하시다가 할머니에게 좋지 않은 영향인듯해서 장녀인 저희 엄마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올해로 5년째 할머니를 모시면서 현실적인 어려움보다는 칠십 가까운 본인의 몸도 돌봄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가고 있는데 구순에 가까운 할머니를 모시며 자꾸만 자기 안의 올라오는 미움에 스스로 죄책감을 가지시며 심리적인 어려움을 이중으로 겪고 있으셨거든요.


시어머니나 외할머니나 결국엔 요양원으로 가시는 것을 항상 마음에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이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우선은 본인들이 원치 않으시고 자식들 마저도 자기가 끌어앉고 있는 게 자신의 마음에 덜 죄스러우니 자꾸만 인내를 연장만 하고 있습니다. 시누도 실제로 지금껏 모시다 어떻게 요양원을 보내냐 하고 저희 엄마 역시 처음부터 안 모셨으면 모르지만 모시다 힘들다고 요양원으로 보낸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여기시는 듯했습니다. 간병인의 몸과 마음이 무너질지언정 효라는 이름으로 그 둑을 막고 있는 셈이지요. 


자녀의 마음과 몸이 무너지면서까지 우리는 왜 효라는 굴레에 얽히게 될끼요? 그 굴레는 자신뿐 아닌 사회나 주변이 씌어준 건 아닐까요? 이 소설을 보면서 나이 들어 노쇠한 부모를 모시는 것이 마치 내 부모가 내 어린 시절에 돌봄을 주던 그때와 다름없음을 보았습니다. 


부모도 어린 자녀를 키우며 행복하기도 하지만 때론 지극한 현실에 치가 떨리며 아이가 미워지는 순간도 있으니 말입니다. 나이 드시고 병든 부모를 돌보는 것도 같습니다. 자녀이기에 도리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내 모든 것을 움켜쥐는 듯한 부모의 병, 그리고 부모가 미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준성 역시 한 번씩 아버지를 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합니다. 왜냐면 부모이고 자식이니깐요. 그리고 자녀 된 도리도 써 부모를 때리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도 어긋나니 그 도덕성이 준성이의 직접적인 폭력을 잠재웁니다. 하지만 그 폭력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무의식 안에 잠재적으로 응축이 되어버립니다. 미움이 없어져서가 아닌 미움을 들어내면 안 되기에 그 미움을 외면하는 꼴이 되니 말입니다. 그렇게 잘 참아온 자신의 도덕성은 자신을 향한 도덕성을 타인으로부터 충족될 때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끝으로 몰리는 거 같은 준성의 현실 앞에 도덕성은 자꾸만 숨어버립니다. 준성은 끝까지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려 한 만큼 자신도 그 도덕성을 타인에게 기대했지만 준성이 사고낸 롤스로이스 차주는 전혀 그런 도덕성을 준성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느 연예인처럼 너른 아량으로 준성의 처지를 봐주었다면 준성은 달랐을까요?



명주가 원하는 현실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남들이 평범하게 일구어 내는 일상, 그것이었지만 그 일상조차 살아내지 못하는 자신 또 환경을 마주하며 자꾸만 비현실의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며 현실과 비현실에 구분이 어려워지는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자신의 일상을 되찾고 싶지만 그러기에 엄마는 이미 나무관에 누워 미라가 되어가고 그렇게 만든 자신에 대한 죄스러움이 명주를 자꾸만 현실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명주가 바래마지않은 것은 결코 대단한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안타깝고 가장 애처로운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실의 일상조차도 꿈꿀 수 없고 그것이 꿈인 사람들의 심정을 우리는 알기나 할까요?



명주의 말처럼 돌봄은 예고되지도 않고 마찬가지로 끝도 결코 예고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불어닥치는 재난 수준의 현실인 것입니다. 저희 엄마 같은 경우도 얼마 전 할머니가 집 앞에서 슬쩍 넘어지셨을 뿐인데도 연세가 있어서인지 바로 고관절이 골절되고 그로 인해 상황이 대 역전이 되어버립니다. 수술을 원하는 막냇삼촌의 의지에 할머니는 삼촌 친구네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하게 되고 수술 후 식사도 하시고 호전되는 듯 보였는데 하루아침에 뇌경색이 오며 뇌경색 시술 끝에 결국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연세가 있으니 연명치료에 대한 가족들의 의견에 따라 지금은 누워만 계십니다. 이 또한 언제 끝날지 예고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예고되지 않은 간병과 돌봄은 일방이 아닙니다. 쌍방이고 그 책임을 지어야 할 누군가가 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를 모시고 있던 엄마는 할머니 병세로 인해 돌봄과 간병의 자리에서 물러나게는 되지만 자녀로서 가지는 효는 그 자리를 더 짙게 만듭니다. 그동안 마음에만 지고 있던 죄책감이 할머니의 병세로 인해 더 가중되는 것이지요. 엄마에게 그동안 고생하셨다고 엄마는 충분히 잘 하셨다는 말과 함께 오히려 간병의 위치가 바뀐 것으로 다행이다 여기자 했습니다. 



명주가 엄마를 미라로 만들 수 있었던 동기는 자기도 죽을 거라 여기고 여차하면 죽어버리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죽어버리면 자신의 범죄가 가리어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니면 세상에서 뻔하게 떠들 간병의 짐에 자신의 목숨마저도 져버렸다며 사람들의 동정심을 얻어낼 수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미래의 동정심을 가져와 자신의 범죄를 은폐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예고한 미래에 지금 당장 눈앞에 것을 누리고픈 욕망을 실현하고 싶은 것이 인간 본성일 가요? 스스로 예고한 미래가 결코 자신의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주는 미처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바라던 현실을 마주하는 것은 그 현실에 오래도록 기거하고 싶게 만드는 마법이라는 것을 명주는 미처 몰랐던 것이지요. 현실은 그만큼 비현실적 세계로 빠지는 이에게 신기루 같으니 말입니다. 



준성과 명주가 처음부터 부모에 대한 범죄를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묵묵히 감당하며 자꾸만 없어지는 인내를 쥐어짜내어 간병인으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돌봄의 시작도 예고가 없듯이 돌봄의 끝도 예고 없이 찾아와 버립니다. 자신의 간병인으로서의 현실이 끝나기를 바란 그 순간이 사라지자 이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덮칩니다. 


어쩌면 살아갈 이유가 살아낼 근간이 되었던 자신이 돌보던 부모의 부재를 통해 심리적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던 걸까요? 부모가 사리진 그 자리를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자신을 지탱해 주던 그리고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던 이성의 끈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현실이라는 그림자가 닥치는 것이죠. 명주는 엄마의 연금이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당장 끊길 것이었고 준성은 자신이 그토록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갈 원동력이 되는 아버지를 잃게 됨으로써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 것이죠. 



준성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아버지의 인생을 아버지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것도 한 인생이야'라는 말에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이 다르듯 살아가는 모습이 다른 건 분명하지만 현실이 가혹할수록 우리는 다른 이의 살아가는 모습에 가깝지 못한 스스로를 생의 축으로 끼지 못하게 합니다. 저마다의 생은 준성 아버지의 말처럼 이것도 저것도 다 한 생일 뿐인데 자신의 기대만큼 살아내지 못하는 생은 생의 한 축에도 들지 못하게끔 자신이 밀어만 냅니다. 


명주와 대비되는 준성의 마음 씀씀이와 친근함은 되려 준성이 겪게 되는 현실에서 쓴맛을 자아내지만 결국 아버지의 말을 통해 준성은 자신의 현실을 올곧게 살아갈 태도를 얻어냅니다. 명주 역시 끝내버리기로 작정한 자신의 삶 안의 엄마 삼고자 하는 은빛 요양원 할머니를 받아들이므로 다시금 살아낼 이유를 얻어낸 것이지요. 이것이 그들이 겨울을 지나온 방식에 대한 대가라고 할까요?



어떠한 이유에서도 그들의 반도덕적이고 폐륜적인 범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이 그들의 범죄를 동정할지언정 그들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정당함입니다. 겨울을 지나온 방식에서 벗어나 봄을 맞이하는 그들이지만 그들의 봄은 그들의 의지로 피워낸 것이 아닌 봄을 피워내는 겨울의 차다움으로 그들의 삶은 견뎌질 것입니다. 자연스레 피어나는 계절을 그들은 억지로 꺾어낸 셈이니깐요. 꺾어낸 계절에 대한 상처와 아픔은 그들의 몫입니다. 마지막에 열린 결말로 읽는 인간적인 독자로 하여금 안도감을 주기는 했지만 그들의 삶이 봄을 맞이한 것은 아닙니다, 겨울을 지나왔지만 그들에게 겨울의 그림자는 영원히 드리워질 것입니다. 겨울의 그림자를 등지고 봄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떠안는 것입니다. 


은빛 요양원 할머니가 트럭에 올라타고 할머니를 엄마 삼지하는 명주는 최소한의 도덕적 명분을 위해 설정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도덕적이며 패륜아적인 요소에 요양원 할머니와 함께 하게 되므로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명분을 삼는 것이 이 소설을 끝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끝까지 자신들의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수작으로 인간 본성에 지리멸렬함이 느껴지는 마무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애처롭고 안타깝고 애잔한 건 그런 현실이 지극히 우리의 삶이기 때문일 겁니다. 


박혜진(문학평론가) 추천의 말


마지막 추천의 말 중에 가장 와닿은 문장입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치하할 수 없고 누구의 탓도 아닌 그저 살아가는 모습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그저 이런 생도 있고 저런 생도 있는 가운데 우리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어떠한 처치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자극적인 요소에 이것이 소설이구나라는 것으로 무게감을 덜기도 했지만 돌봄과 간병을 직간접적으로 경험 중인 저에게는 소설만으로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돌봄과 간병을 개인의 문제뿐 아닌 제도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앞으로 더 필요할 것이고 그저 형식적인 차원이 아닌 실질적인 차원에게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도 반드시 국가적 차원에서 다뤄야 합니다. 


밑바닥에 거하는 이들이 어둠에 거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밑바닥일지언정 수면 위로 올라오고픈 욕망을 가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과 일상조차 살아내지 못하는 일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그들의 꿈이 그저 꿈일 뿐이 아님을 일깨워주기 위해 우리는 더더욱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올해는 유독 제 개인적인 상황 때문이었는지 돌봄과 가병에 대한 책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병을 가지게 되는 건 그때와 시기가 저마다 다를 뿐이고 그에 따라 내가 돌봄 자나 간병사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개인이 짊어질 짐이 조금 덜 무겁도록 개인의 준비와 앞으로 기대수명이 높아지는 만큼 돌봄과 간병에 대한 시대적 제안도 분명한 현실적 요구라는 것도 말입니다. 


소설같이 간병으로 인해 짊어진 무게로 인해 스스로  인생을 져버리는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진주서평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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