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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Nov 20. 2023

진주서평 완전한 행복




     

완전한 행복이란 무엇이며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가능한 것일까?



지난 주말 500쪽이 넘는 소설을 단숨에 읽어 치웠습니다. 평소 궁금증은 가지고 있어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은 작가의 작품이었다고 할까요? 그런 와중에 북클럽 멤버 중 한 분이 정유정 작가님 소설 이야기를 많이 하시길래 한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에 빌린 것이 <완전한 행복>이었습니다. 


평범한 인물의 완전한 행복의 정의를 실현한 소설일 거라는 제 착각은 너무도 순진했고 소설에 등장하는 유나의 나르시시스트는 지금까지 접해 본 나르시시트의 끝판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경악하게 만드는 읽어 본 소설 중 가장 찝찝한 소설로 기록으로 남았으며 다시는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은 보지 않겠다는 다짐도 하게 합니다. 


그만큼 흡입력이 있고 완전무결에 가까운 소설적 구성과 필체는 소설을 보고 난 후 밀려오는 감정에 진저리가 처지는 결과로 남았고 말입니다. 



도대체 이 소설을 나르시시트의 최후라고 봐야 하는가... 잘못된 양육방식의 변이라고 해야 하나? 몰입감에 단숨에 읽어 내려가긴 했지만 찝찝한 느낌은 덤? 완벽한 행복,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이 자신을 방해하는 온갖 요소가 제거되야지만 가능한 것인가? 돈이 없으면 돈이 있으면 행복할 거 같다 하지만 정작 돈이 생기면 다른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로 인해 그 문제만 없으면 또 다른 행복이 올 거라 여기는 것이 인간 보편성인가? 단순히 나르시시트의 행보와 최후라고 보기에는 인간 본성 저편에 숨겨진 악의가 꽉 들어찬 소설이라 여긴다. 가장 아프고 슬픈 영혼은 어린 지유, 여리지만 강한 순수가 결국 자신의 신적인 존재로부터 구원되는 서사, 살아남기 위해 신적인 존재의 복종하지만 자신으로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위한 순종으로 승화하는 어린 영혼 소설적 요소로 치면 몰입감 최고의 극적인 전개와 치밀함까지 뭐하나 버릴 게 없지만 독자로서 내 취향은 다시는 안 보고 싶은 소설이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한 인간의 서사가 이리도 처절하게 깔아뭉개지는 것에 대한 피로감과 피로 물드는 전개가 굉장히 불쾌하다. (읽자마자 날 것으로 쓴 소설 후기)





아마도 등장인물에 따라 제 감정이 더 동요되기는 합니다. 자녀가 나오면 말이지요. 손원평의 <아몬드>를 읽었을 때도 소설 뒤끝이 너무도 오래 남아 불편했던 기억이 있는데 역시나 자녀가 나오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엄마독자는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이나 이야기에는 감정적 전이가 자동이기에 소설로서만 읽히지 않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저는 매우 많이 그렇더라고요. <완전한 행복>도 불편하고 불쾌했던 것이 아마도 주요 등장인물인 유치원생 지유 때문일 겁니다. 위문장에서만 보더라도 어린아이가 스스로 떠안고 감당해야 하는 불안적 요소는 읽는 엄마 독자로 하여금 심히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킵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괴물과도 같은 엄마이지만 엄마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엄마로 인해 자신에게 가중되는 온갖 불안과 두려움을 스스로 삼켜버리는 어린 영혼입니다. 엄마가 할머니 손에 규칙대로 철저히 할머니 기준에 따라 자라온 것처럼 그의 딸 역시 그의 기준대로 키워져 온 것이지요. 아이에게 엄마는 신적인 존재이기에 그 신이 설령 괴물이라고 할지라도 따라야만 합니다. 그만큼 엄마라는 존재에는 아이에 세상이자 전부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먹히는 한이 있어도 버려지는 것은 두려운 아이 말입니다. 





소설적 요소와 작가가 중심적으로 그려낸 나르시시스트의 행적으로만 보면 자극적 요소 충만한 재미있는 소설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제가 중심적으로 본 것은 감정적 기류입니다. 인간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연약하고 또 강할 수 있는지 이 소설을 통해 절실히 느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라는 것이 해석에 따라 사람을 괴물로 만들기도 하고 자신을 구원하기도 한다는 것도 말입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인 유나는 어린 시절의 버림받았다는 사실보다는 버림받은 것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자신이 저지르는 온갖 괴물적 짓(?)을 정당화시킵니다.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유나의 경우는 환경적 요소도 무시를 하지 못합니다. 부모로부터 버림을 당했다 여기고 부모 대신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 역시 나르시시스트 면모 다운 기질로 유나를 규칙에 가두고 자신의 손아귀에 따라 쥐고 흔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할아버지는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습니다. 


한편 유나의 희생양이 왜 다 남자일까 하는 부분이 여기서 실마리를 찾습니다. 자신을 데려가 달라 애원한 아빠도 유나의 손길을 뿌리치고 자신이 할머니 손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도 남자인 할아버지는 지켜보기만 할 뿐입니다. 남자라는 존재는  유나에게 결코 자신을 구원하는 손길이 아니었던 걸까요? 자신의 행복을 앗아가거나 자신의 행복을 등한시하는 남자는 그저 제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유나로서 당연한 처사일 듯합니다. 물론 유나 입장에서만 말이지요. 


하지만 유나는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끊임없이 구원을 받고자 합니다. 유나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완전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편의 존재가 필수적인 요소이니 말입니다. 




유나가 말하는 행복은 자신에게 불필요한 것은 제거해버리는 요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자신의 기준에서 모든 것이 자행되는 것이지요. 행복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1인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나에게 행복은 오로지 1인칭으로서만 존재하기에 자신 외 다른 것은 그저 유나의 행복을 꾸며낼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요소가 아닌 감정이자 순간이라는 것을 유나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을까요? 지유가 엄마가 미소 짓는 귀한 순간을 사랑했듯이(p.29) 유나는 지유의 천진하고 아이다운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사랑스럽게 느끼지 못했을까요? 자신이 그런 순간의 찰나를 겪지 못했기 때문인가요?



받아보지 못한 행복은 흉내 내기 어렵고 받아본 행복으로 내 행복을 지어낼 수 있다는 면에서 유나는 슬픈 아이기도 합니다. 반면 유나의 언니 재인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따듯한 온기의 행복의 기억으로 적어도 괴물이 되진 않았습니다. 비록 아빠에게 믿는 딸이 되는 것이 가치 있는 것(p.503)이라 여기며 역시나 아빠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자신대로 살아내진 않았지만 적어도 동생인 유나처럼 괴물이 되진 않았으니깐요. 버림받은 기억의 순간이 자신을 살게 하는 유나와 아버지로 인한 찰나의 행복의 순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재인, 두 자매의 운명이 갈리게 되는 건 도대체 누굴 탓하며 무엇 때문인지 설명이 가능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매이기에 핏줄이기에 재인은 자신의 동생이 자행한 모든 악행에 대해 일말의 여지를 남기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자신을 '도둑년'이라 부르는 동생의 악행을 알게 되는 건 자신이 진짜 도둑년이기에 유나가 그렇게 되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을까요? 자신의 무의식이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지고 있게 했던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인이 유나의 악행을 끌어내릴 수 있었던 건 동생의 딸인 지유 때문일 것입니다. 괴물을 또 만들 수는 없으니깐요. 동생 유나의 괴물적 서사를 끌어내릴 수 있고 비로소 그 괴물의 악행을 종식시킬 수 있는 건 자신의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서로 행복에 대한 의의와 기대치가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것인지 유나가 꼭 나르시시스트이기 때문이 아닌 평범한 관계 안에서도 행복의 기준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납니다. 두 번째 결혼만큼은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내인 유나에게 자발적 복종의 자세(p.63)로 사는 것이 행복을 위한 노력이라 여기던 차인호는 자신의 친아들이 죽음으로서 말미암아 비로소 눈을 뜨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에 대한 이해가 아내인 유나와 달랐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신에게 그토록 빛나고 눈부시던 사랑해마지않던 아내인 유나라는 꽃이 한순간에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게 한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말입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사랑스러움의 유나는 자신의 행복을 빛내줄 인물에 불과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닌 차인호 역시 두 번 때 결혼을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 삼아 아내 유나를 자신의 행복의 요소로 빗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작 가장 빛날 자신의 아들이 잿빛으로 자신의 옆에서 영원한 잠에 든 것을 보고서야 자신의 행복에 져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요. 내가 만들어낸 행복의 빛남과 진짜 행복의 빛남은 다를 테니 말입니다. 




완전한 행복에서 가장 아프지만 가장 강인하고 가장 순수하게 행복을 발견할 수 있고 행복 자체인  지유는 자신에게 자행되어 온 엄마라는 규칙을 비로소 끊어내고 자신에 행복을 책임져 줄 또 다른 빛인 이모 재인에게 다가갑니다. 재인 역시 어린 영혼인 지유로 인해서 치유되고 구원되는 것입니다. 그 어린 시절 스스로 책임질 수 없었고 어른들의 손에서 자신의 행복이 판가름 나던 힘없는 그때의 자신을 지유를 통해 건져내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스트의 근본은 애정욕구입니다. 유나는 나르시시스트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지만 유나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거침없이 자행하는 범죄는 반인격장애에 속합니다. 만약 유나가 애정욕구가 충족된 가정에서 자랐다면 또 다른 유나가 되었을까요? 


올해 저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 책이 <나르시시즘 그 판도라 상자를 열다>입니다. 제가 경험한 나르시시스트 남녀 차이는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기질적으로 나르시시즘이 판이하게 드러나는 양상이 다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제 경험에서 말입니다. 곧 진주서평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는 나르시시스트를 내세워 행복에 대한 조건을 이야기했지만 저는 이 소설을 조금은 다르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결과가 아닌 원인에 말입니다. 부모라는 세상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역사이자 배경인지 그리고 아이라는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자 행복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축복이 되지 못한 아이의 존재는 행복이라는 그늘에 앉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행복의 그늘에만 앉을 순 없지만 나무의 그늘이 뙤약볕을 견디게 해주는 것처럼 아이가 경험한 순간은 행복의 그늘이 되어 아이가 필요할 때마다 삶을 견디게 해주는 기댈 구석이 됩니다. 


단 한순간도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 없이 자신에게 가행된 현실과 처지를 온몸으로 악을 쓰며 받아내야 했던 유나도 어린 아이였습니다. 악을 써도 자신을 구원해 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증오는 유나를 살아가게 하는 근원이 되지만 그 근원의 뿌리는 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잉태한 지유를 통해 자신을 구원해 주지 못한 아버지 대한 남편이라는 남자를 통해 완벽한 행복의 그림을 그려내고 싶었지만 그 행복의 형태와 의미 역시 유나와 맞을 남자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유나의 행복에는 다른 이의 그림자가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암흑이었으니 말입니다. 유나에게 빛과도 같던 존재인 지유는 암흑뿐인 그늘에서조차 엄마의 미소를 통해 빛이라는 그림자를 드리우며 자신을 지켜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구원의 빛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엄마이고 아이였기 때문일까요? 



완전한 행복이 무엇일까요? 애초에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요? 완전한 행복은 내 안에서 충만하게 채워지는 온기이자 따스함입니다. 내적 충만과 내적 온기는 채워내는 것이 아닌 채워짐입니다. 행복의 채워짐은 내게 오는 것이자 내게 허락되는 축복입니다. 그 행복한 내적 충만함이 오늘 여러분에게 찾아오길 바라며 진주서평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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