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중간중간 뭉클함에 눈물이 차올랐는데 다 읽고 난 후 먹먹함은 무엇일까? 결국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거구나 라는 애잔함이라고 할까?
평범이라고 하기에는 버라이어티한 삶을 산 푸구이. 격동의 시간이 있었기에 지나온 시간에 대한 평범함을 말할 수 있었다. 운명에 반하기 보다는 그 운명에 순응적으로 마치 자신이 키우는 소처럼 묵묵하게 걸어온 푸구이의 삶.
살아갈 힘이 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음에 그저 기쁘게 인생을 즐기게 되는 것일까?
저한테는 오직 펑샤를 그리워하는 복만 있을 뿐이에요
서로의 결핍이 사랑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각자의 결핍을 함께 짊어지게 됨으로써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이 아닐까? 요즘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에 반하는 두사람이지만 그래서 귀하고 아름답다. 서로의 결핍이 결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지나고 난 자리에 또 다른 사랑의 기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사랑의 힘이 아닐까 싶다. 오직 펑샤만을 사랑했고 그 사랑했던 기억으로 그리움을 사랑삼아 살아갈 남자, 얼시.
사람은 결국 혼자이지만 가는 길에 홀로사는 것일뿐 살아가는 동안 인생을 논할 가족과 벗이 운명처럼 함께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푸구이에게는 아내 자전이, 푸구이의 딸 펑샤에게는 얼시가 있었기에 결국 혼자가 되는 길을 걷게 될 지언정 외로움이 그들의 마음을 사무치게 하지 않는다. 그리움만이 남을 뿐이지.
핵개인화 시대로 가족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시대지만 부부와 가족애에 대한 서사가 넘치는 인생이라는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생의 근본인 가정의 안락함은 유지될거라 여기고 유지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
푸구이가 도살을 앞둔 늙은 소에게 자신에 이름을 불러준 것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고 살 희망이 되었던 존재들을 먼자 앞세운 후 자신을 돌볼 이유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자신같은 늙은소를 돌보며 그렇게 자신을 돌보며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
중국 역사적 사건은 둘째치고 인생사라는 것이 역시안에서 흐르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저 시대적 배경일 뿐이지만 그 또한 살아가는 이들의 운명이라는 것과 내가 살아가는 이 역사의 시점에서도 그 역사라는 배경안에 내 인생이 그려져나가고 있구나를 처음으로 느껴본다.
이렇게 인생이라는 것이 굉장히 사소한 개인의 영역일거 같지만 그 배경안에 존재하는 시대적 상황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영역이 아니기에 그래서 인생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구나라는 묘한 안도감도 갖게 한다.
마흔 중만을 넘으며 인생에 대한 회고는 '인생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와 내 마음같은 사람이 없구나'인데 소설을 통해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인생 절반을 지나고야 깨달아지는 건 지금이라도 제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라는 무언의 압력이자 응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올해 소설을 통해 인생 서사를 읽어내려가며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 서사의 격변을 마주하는 중이다. 인생 소설 초반 길고 긴 작가의 말에서 나의 이런 마음을 간파한듯한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참 반가웠다.
살아가는 것이 무언가를 위한 것이라면 그 무언가에 얽매인 삶이 되어버릴 것이다. 사는 건 그냥 사는 것이다. 살다보면 둥글 때도 있고 모가 날 때도 있고 가시밭길이자 때로는 꽃길 같은 것이 인생이다. 어느 한쪽으로만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그저 어제를 산 힘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 삶이자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