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쓰다/2
살면서 답이 없음을 느낀 것이 마흔 줄에 접어들면 서다. 비로소 인생이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까? 어쩌면 사십여 년을 하나님을 믿고 살면서도 내 힘과 뜻을 믿으며 살지 않았나 싶다. 하나님은 때때로 필요한 옵션으로 끼워 넣고 말이다. 그야말로 필요에 의한 존재감이었다고 할까?
그 필요에 따라 쓰이던 하나님의 쓸모는 마흔 이후에 빛을 발한다. 마흔 넘어 내가 마주하는 현실은 그야말로 답이 없다였다.
시어머니의 투병으로 인한 남편의 공백, 커가는 아이들과의 연속적인 부딪힘, 육아와 집안일, 거기에 일까지 하느라 방전된 체력으로 인한 불편함까지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무게감에 매일매일이 한계였고 매일매일이 고비였다.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견딜만한 것은 매일 나 자신과의 내적 싸움에서의 승리감정도라고 할까?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그리스도께서 건네시는 것들을
감사로 받아들이는 수용력이다
-스탠리 존스/하나님의 예스-
당연하다 여기는 성격 탓에 당연하지 않거나 당연하지 못하게 여겨지는 사람에 대한 불이해는 신앙생활을 할수록 나의 발목을 잡았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대한 마음은 은혜와는 거리가 멀고 감사를 멀리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나 스스로를 당연하게 행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조차 교만이고 오만이었던 것을 알지 못했다.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였소
-손경민/은혜 찬양-
당연하다 여기는 것의 시초는 나의 책임감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을 완수했을 뿐이고 그 책임에 대한 최선을 다하기 위해 살아온 삶이었는데 당연하지 못하다 여기는 상황이나 사람을 알면 알수록 책임을 다하지 못한 탓을 하기 일쑤였다.
특히 남편에게 말이다. 내가 당연하다 여기는 것에 반하는 사람은 남편이었고 그 당연한 것이 이행되지 못할 때마다 남편에 대한 불이해와 원망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남편이 최우선으로 여기는 책임이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가정이 아닌 남편이 독립되고 분리되어야 할 시댁에게만 쏠렸으니 말이다.
남편과는 살아갈수록 외로움이 사무치는 결혼 생활이었고 그 외로움을 토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내 마음 가장 아실 이...
광야 생활과도 같은 결혼생활 중에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더하시고 때때마다 채워주시는 은혜의 단비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고 의지였다. 여전히 남편과 살 소망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간구한다.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이사야 38장 17절 말씀 중-
남편과의 불통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가능케 하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지키기 어려운 소명이지만 나의 고통 중에 거하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안을 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