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 진주서평
연휴 직전 연휴내 읽을 책을 무작정 도서관에서 뽑아 왔어요. 마침 대출 가능한 상태로 있던 이 책을 드디어 읽게 됩니다. 어린이라는 세계 시작합니다.
어른은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이 책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아닐까 싶어요. 이 질문에 대한 고민과 답을 원하는 어른만이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어린이와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가르치는 일을 하고 그 대상이 주로 어린이었으니 말이에요. 20대때 어른인 저를 거쳐간 수많은 어린이에게는 먼저 사과를 하고 싶어요. 그 시절 몸만 어른인 저에게 어린이는 그저 가르쳐야 하는 대상일 뿐이었거든요.
아이셋을 키우면서도 여전히 몸만 어른이었던 거 같아요. 키우는 일에 대한 고단함과 해야할 것에 신경이 쏠리다보니 어린이의 아이다움을 온전히 받아낼 여력이 없었다고 할까요? 부끄럽게도 아이다움을 인정할 애초의 마음조차 없었단 것이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다 셋째를 낳고 키우면서 아이다움이 슬며시 저에게 스미기 시작합니다. 셋째라 그런가요? 아니면 제 안의 아이다움을 심겨주기 위한 선물이었을까요? 마냥 아이스러운 면모를 여과없이 표현하는 아이 그 자체 어린이가 제 눈과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환대한다는 사실이다
어린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우리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어른이기에 어른스러운 면모만 보여야 한다는 사실은 나이들수록 사그라듭니다. 어른 사이에서 어린이스러움은 조금 부끄러울 수 있으니 어린이가 함께 하는 환경에서는 기꺼이 어린이스러운 면을 어린이에게 살짝 들켜도 어린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인정해줍니다.
진지하기만 한 선생님이나 엄마가 아닌 때로는 아이스러운 장난끼를 어린이에게 여과없이 표현할 수 있는 어른이의 모습은 어린이 마음에 공감을 표합니다. 그렇게 어린이 마음에 가닿게 되는거에요. 어른이라는 세계의 입성은 어른스러움이 아닌 아이다움과 어린이스러움이라는 것!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어린이의 속도감은 어린이의 기준보다는 어른의 편의와 기준에서 움직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 역시 아이셋을 키우며 아이들의 속도감을 인정하기보다는 엄마 속도에 맞춰 채근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에 푸념을 하기 일쑤였던거 같아요. 진짜 어린이에게 사과할 일이 한두개가 아니네요?
그러다 여러가지 면에서 느린 편이었던 딸을 키우며 아이 속도감을 조금씩 감지하기 시작했답니다. 아이마다 어른 속도에 맞춰지는 아이도 있지만 타고나길 느린 아이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른인 내 속도가 아닌 아이 속도에 맞춰야지 아이는 아이다움을 잃지 않고 자랄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기다려주는 어른이 있었기에 아이는 기다려주는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딸을 키우면서 알게 되니 더 이상 채근은 할 수 없었습니다. 채근하는 어른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으니깐요.
어른이 아이다움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탓이라고 할까요? 아이 특유의 자기가 주인공인 자기 세상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자기 이야기에 대해서는 부풀리기 대장일 수밖에 없는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른의 세계와는 완전 반대되니깐요.
자기가 주인공이 되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고 허세나 부풀리기는 실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게 어른의 세계니깐 말이지요. 어른은 이미 어른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나 보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깐 주인공처럼 보이는 사람이 얄밉고 질투가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이의 세계는 다릅니다. 어린이 저마다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자기 이야기를 특별하게 느껴야 하는 건 어린이의 세계만의 특권입니다. 언제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어른의 때가 분명 오니깐 말입니다.
혹시 어른의 세계에서 어린이를 들러리로 세우진 않나요?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는 자리를 어른이 낚아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이 책을 읽으며 뭉클하기도 하고 어린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 킥킥 웃기도 하면서 마치 어린이의 세계를 엿보는 듯 즐거웠답니다. 무엇보다 어린이를 한 존재로써 대접하고 존중하는 작가의 태도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쓰실 수 있었겠죠?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주는 품위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40대 후반이 되고 보니 품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보다 품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주변 인물이 없음이 이상했고 품격이라는 것은 단 한번의 완성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자신을 단정하게 다스려야 하는 어려운 경지라는 것을 말이지요.
아이의 품위를 지켜주고 싶은 어른은 이미 자기 인격을 다듬으며 품위를 쌓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순히 아이이기때문에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아닌 한 인격체로써 인정하고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인물로써 인정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어른만의 세계가 아닌 어린이의 세계도 동시에 이뤄진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린이의 세계를 지나 지금의 어른의 세계로 입성한 것이니 말이지요.
선생님은 어린이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만나는 전문가이고
때로는 유일하게 만나는 지식인이다
이 문장을 읽고는 무한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적인 면을 아이들에게 얼마만큼이나 펼쳐보이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 부모님이 "선생님을 통해 즐겁게 음악을 알아가는 듯 해서 뿌듯합니다"라는 메세지를 주신 적이 있는데 제가 한 것보다 아이들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알아채시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에 사명감이 더 짙어졌다고 할까요?
단순히 아이들에게 음악적 기술을 익히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이 아닌 음악 전반에 대한 지식 전제를 아우를 수 있고 그것을 기반으로 아이 인생에 음악이라는 꽃이 피워질 수 있다는 것이 내 일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아이다움을 인지한 어른은 아이다움에 대한 자유를 인정해 줄것입니다. 존재로써 오로지 받아들여짐을 경험한 어린이는 비틀린 것 없이 빛에도 어둠에도 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이미 어른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가끔 그들의 어린이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린이때의 수용됨이 있었는지 받아들여짐이 그 어린이에게 허락되었지에 따라 어떤 어른이 된다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어떤 어른이 된 것의 최초의 가해자는 어른이었으니 말입니다.
어린이에게는 어른들이 환경이고 세계라는 사실
어린이에게 최초의 세계는 어린이가 처음 만나는 어른입니다. 처음 만나는 어른에 따라 어린이의 세계는 천지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어린이를 키우는 부모도 어린이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어린이들이 마주하게 될 세계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틀린 데 없이 빛과 어둠속에 있을지라도 존재로써 자기다운 어린이가 아름다운 세상을 빛낼 어른으로 성장함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린이의 세계는 어른의 세계로의 입성을 위한 최초의 세계이니깐요.
모든 어린이들이 행복하길 소망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어린이라는 세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