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끝마다 "나는 사춘기잖아." 라며 자신이 하는 짓(?)에 대한 타당성을 입증하던 중딩이 새삼스레 부러워진다. "엄마 갱년기잖아."라며 나도 핑계삼아 써 먹어 볼 참이다. 갱년기 아직은 이른듯 하지만 마흔을 삼십대 중후반부터 대비하던 나란 사람이 갱년기라고 별 다르겠나 싶다. 참 준비성이 대단하다싶다. 그렇게 준비한 사십대에 결국은 이론과 실체는 엄연히 다르다는 교훈을 얻고도 말이다.
사는 일은 책과 다르다. 더 치열하고 더 고달프고 더 애달프다못해 못해먹겠다, 그만 살자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다. 무언가 되고 싶던 마흔을 앞둔 삼십대 후반이 그랬고 여전히 무언가 될거 같은데 흐지부지한 사십대 중반이 또 그렇다. 도대체 뭐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안달일까?
뭐가 되고 싶은 나는 뭐가 되려고 준비하는 것들에게 자꾸만 밀린다. 딱 그럴 나이인가? 모든것이 학령기인 아이들에게 맞춰지고 맞추면서도 불만스럽다. 엄마도 뭐가 되고 싶은데 엄마도 아직 하고 싶은게 많은데 말이다.
되고 싶은 나는 자꾸만 뒤로 밀리는 통에 마음에 가시가 자꾸만 돋아난다. 고상한(?)엄마 축에 끼고 싶어 실체를 들어내지 않지만 요즘 아슬아슬하다. 특히나 중딩이 두명이 되고보니 중딩스럽게 이런저런 요구가 많아진니 내 마음이 더 요동친다. 엄마 욕구를 참으며 중딩들의 요구를 들어주려니 괜히 샘이나서 죽겠다. 결국 어느정도 선에서 아이들 요구는 들어줄테지만 말이다.
그래 샘이 난다. 너네는 자라는 새싹인데 나는 자꾸만 꺽이려는 신호만 보내는 마른 잎싹 같아서 말이다. 마른 잎싹에 어떻게든 생기를 불어넣어주려니 내 속이 타들어가 죽겠다. 새파란 새싹은 자꾸만 피어오르는데 말이다.
결국 엄마로써의 선택을 할 사람임을 안다. 나와 엄마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내 안에 투쟁은 끊임이 없지만 난 결국 엄마를 선택할 걸 안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라도 투정을 부려본다.
나도 하고 싶은게 많고 나도 되고 싶은게 많다고 말이다!
단언하건데 너희의 사춘기보다 엄마의 갱년기는 더 요란할 것이다. "엄마 갱년기잖아."라는 핑계로 너희들의 싹을 밟는 일은 없을테지만 적어도 엄마는 마른 잎싹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아니 적어도 마른 잎싹채로 떨어지진 않도록 갱년기를 잘 써먹을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