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온/오프

by 진주


드디어 방학식이다. 방학식이라 짧을 줄 알았던 원격수업은 선생님들의 여러가지 프로그램 준비와 방학식으로 1학기 마무리가 된다. 3주이상 지속된 원격수업으로 학생뿐 아닌 선생님들도 지치시는 게 느껴진다. 듣기 싫어도 두아이 원격 수업을 듣게 되니 자연스레 선생님 목소리에 감정이 들리는 듯 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과 바톤터치 하듯 원격 수업이 끝나자마자 내 마음은 온(on)을 누른다.


지금 이 순간부터 과한 자극에 반응하지 않기! 엄마에게 과한 자극이란 아이들의 짜증과 투정, 서로 치고받는 말싸움이다. 우리 아이들은 말싸움을 몸싸움처럼 한다. 차라리 몸싸움이 낫지, 질질 끌며 서로 물고 뜯는 말싸움을 듣고 있노라면 나까지 싸움에 휘둘리는 기분이다. 나란 엄마는 오감이 예민하고 특히 외부 자극에 민감한 편이라 남들은 그냥 흘리는 것을, 나는 다 주워 담으며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그러기에 더욱 귀를 닫고 자극을 차단하는 일에 애를 쓰며 내 에너지를 아낀다.


원격수업과 코로나라는 환장의 콜라보는 가족들 개개인의 감정을 풀길 없이 엉키고 엉키는 상황을 자꾸 만든다. 그 실타래는 서로다른 메아리가 되어 하루 종일 집안을 울린다. 고로 아이들의 투닥이는 소리가 끊임없다는 말이다.


차라리 분리되어 각자 영역을 유지하면 될 텐데, 엄마는 전혀 관계중심이 아닌데 우리 아이들은 관계 중심 성향이라 서로 치고받으면서도 같이 있으려 한다. 특히 큰아이는 방을 혼자 쓰기 싫어할 정도로 관계 안에서 있어야지 안정을 느끼는 성향 탓에 초5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는 시간은 학원 가는 시간뿐이다.(미안하다. 엄마는 네가 학원가는 시간에 비소로 안정된다. 우리의 감정 노선은 이렇게 다른 방향을 향하는구나.)


관계보다 자아 중심인 엄마는 아이셋과 복닥이며 집안에서조차 내 숨구멍을 찾아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 바쁘다. 이런 엄마와 매우 상반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엄마 자아에 치명상을 당하는 꼴이다. 방학은 그야말로 휴전 없는 전쟁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런 방학을 슬기롭게 잘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엄마 마음의 다짐이 절대적이다. 같이 있되 서로 거리를 두는 것, 어렵지만 해내야지 서로에게 가하는 타격이 최소화 된다. 그러기에 엄마의 선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 선을 유지하는 것이 곧 아이들과의 안녕을 의미하니 말이다.


요즘 내 굴 속은 화장실이다. 화장실로 대피하는 건 셋째를 키우면서부터다. 엄마의 분신인 마냥 엄마 옆에 꼭 붙어 있으려는 셋째 덕에 나는 집안 그 어디에서도 혼자 있기 어려웠다. 그나마 냄새에 민감하고 깔끔한 셋째가 굳이 화장실까진 쫓아오진 않았으니 천만 다행이다. 대신 화장실 문 밖에서 문을 계속 두드려대지만 말이다.


엄마에게 화장실은 피난처와 같다. 하필 왜 화장실일까 싶지만 화장실 말고는 혼자 오롯이 거할 장소가 집안 내에 딱히 없다. 화장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 공유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 곳이라, 굳이 아이들이 화장실까지 점령하려 하진 않는다. 아이들도 화장실은 혼자만의 은밀한 공간임을 터득한 셈이다.


아이들에게 화가 날 때도 화장실로 직행한다. 과하게 쏟아지는 감정을 스스로 차단하기 위해 선택한 장소에서 그 순간에 충실한 내 얼굴을 한번 들여다본다. 물론 화가 난 내 얼굴을 보는 건 굉장히 불쾌한 기분을 더하는 꼴이지만, 그 덕에 내 감정을 고스란히 들여다보게 된다.(한번 꼭 해보시길 바란다.)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한숨 한번 크게 내쉬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잘해보자! 다시 전쟁터로 출격!


아빠들은 알까? 엄마들이 육아의 순간에 얼마나 많은 고뇌를 하며 다짐을 하는지를 말이다. 매일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을 고쳐먹으며 애쓴다는 걸 과연 알까? 그 애씀이 고스란히 아빠들에게 화살로 쏟아질 텐데 그들은 그 감정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지라 알 길이 없을 거다. 그저 일그러진 엄의들 얼굴에서 그날 육아의 고단함만을 느낄 뿐이지, 구체적으로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아빠들은 알지 못한다.


쓰고 보니 아빠들은 일터에서 상사를 대하고 고쳐먹는 마음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쓰고 보니 엄마나 아빠나 전쟁터에서 애쓰고 있는 건 매한가지네. 상대가 다를 뿐이지. 갑자기 안쓰러운 마음이 스며든다. 일주일에 한두 번 보는 남편이지만 집에 오는 날 진하게 '수고했어' 한마디 해줘야 할 거 같다.


방학식 반나절이 지났다. 앞으로 5시간만 참으면 육퇴를 맞는다. 마치 육퇴를 위해 하루 종일 애쓰는 거 같다. 웃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퇴는 기대된다. 남은 5시간 동안 제발 내 감정이 유지되길 바라고 바란다. 날도 더워 죽겠는데 과한 감정 낭비를 쏟아내고 싶진 않다. 말 그대로 허공에 떠도는 먼지 같은 감정 나부랭이는 엄마인 나도 마음이 상하지만 아이들에게도 치명타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감정 날 것이라기보다는 감정 찌꺼기에 가깝다. 날 것의 감정은 살펴보고 보듬어 줘야 하지만 감정 찌꺼기는 쓰레기통 비우듯 비워버리면 된다. 단지 그 비움의 대상이 아이들이 아니어야 한다 것!


엄마가 흔히 쏟아내 버리는 감정은 감정 찌꺼기에 가깝다. 그 찌꺼기를 뒤집어 씌우기 쉬운 대상은 남편과 아이들이다. 당사자로서는 찌꺼기를 비우니 깨끗함을 얻게 되겠지만 (죄책감은 덤으로 따라오지만 말이다) 그 찌꺼기를 뒤집어쓰는 남편이나 아이들은 감정 찌꺼기를 쌓아버리는 격이 된다. 어른은 성향에 따라 털어버리기도 하며 스스로 해결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고스란히 받아버리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먼 훗날 아이가 사춘기가 되어 반항의 시기를 맞이할 때 그간 모아놓은 감정 찌꺼기를 통째로 엄마에게 던져버리기 전에 지금 당장 감정찌꺼기를 스스로 털어버리자.


감정이라는 것 역시 주는 대로 받고, 받는 대로 주게 되어 있다. 긍정은 긍정으로 부정은 부정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지금 부정의 날 것을 쏟아내고 있는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으로 포장하여 내어 놓는가?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스스로 구분하여 보라는 것이다. 감정의 날 것인지, 감정의 찌꺼기인지 말이다. 감정의 찌꺼기일 경우 화장실에 가서 얼굴 한번 드려다 보고 웃어보자. 화장실 밖을 나가 아이들을 맞이하는 엄마의 얼굴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화장실에서 마주한 엄마의 얼굴 정대반의 모습일 거다.


감정카드로 요즘 나의 주된 감정을 골랐다. '화가 난' 이유는 내 마음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나는 건 엄마의 일을 덜어주기는 커녕 더해주기 때문이다. 셋째는 일주일 새, 화장실 변기커버를 깨고 세면대 수전 마자 망가뜨려놓았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집안에서만 아이들이 아웅다웅하다 보니 서로의 감정이 먼지처럼 집안을 휘날리고, 그 감정을 비우기 위해 외출이라도 하면 전환이 제일 빠른데 요즘 같은 때 외출이 쉽지도 않다. 자가격리를 한번 겪어보니 어딘가를 갈 엄두가 안 난다. 이런 상황에서 화만 뿜어내는 건 집안에서 제일 어른인 내가 제일 아이다운 행동을 보이는 거나 다름없다. 받아들일 여력이 되지 않을 때는 가만 눈감고 그 순간을 흘려보내자. 아이들 스스로 쏟아내는 감정은 고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부모가 주는 감정만 고일뿐이다. 그러기에 아이들이 스스로 내는 감정에 대해서는 흐르게 두어도 괜찮다. 다만 그 감정의 욕구가 실릴 땐 그 욕구를 어른인 부모가 해결해 주어야 한다.


어른인 부모가 어른 다울 때, 어른이 될 아이들은 어른 다움을 배우게 된다. 아이가 커서 보일 어른의 모습은 곧 부모가 행한 어른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 아이셋 합체되는 시간이다. 다시 엄마 마음 온(on) 버튼을 누르며 변신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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