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휴"
"엄마, 왜 한숨 쉬어?"
큰아이가 묻는다.
"왜? 엄마가 한숨 쉬면 걱정돼?"
"음... 엄마 화낼까 봐..."
문득 한숨의 기억들이 지나간다. 나의 한숨은 친정엄마다. 친정엄마의 한숨은 자포자기의 한숨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과 남편 때문에 친정엄마의 한숨은 곧 친정엄마인 양 나에게 각인되었다. 칠십을 바라보는 연세에 지금도 한숨을 쉬시지만 지금 내 나이 때 친정엄마가 내쉬던 한숨과 사뭇 결이 다르다. 이제는 제법 짧아진 한숨이다.
나는 아이셋을 키우며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육아라는 건 내 노력과 의지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가 날 때가 더 많다. 그럴 때마다 한숨을 삭히며 마음을 다스린다. 나에게 한숨은 나 스스로에 대한 위안이자 쉼이다. 한숨을 길고 깊게 내쉬므로 내 의식의 전환을 맞고 싶은 거다. 부정적인 감정의 들숨을 한껏 들이마신 후 날숨으로 날려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싶었다. 나에게 머물러 있는 감정의 소요들을 나 스스로 내보낸 후 새롭게 전환을 맞이하고 싶은 엄마의 의지적 노력인 것이다.
한숨이 길고 깊어지는 건, 그만큼 현실이 뜻대로 되지 않고 돌아가는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내기 벅찬 것이다. 그러기에 자꾸만 한숨이 틈을 보고 들어차는 거다. 한숨이 나갈 곳 없이 가득 차 버리면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떠안는 거다. 시한폭탄을 떠안지 않기 위해서라도 길고 깊게 다시 날숨으로 내보내야 한다.
친정엄마의 가장 길고 깊은 한숨의 때는 나와 같은 40대로 기억된다. 그 시절 40대와 지금 40대는 외형적으로는 큰 차이를 보이지만 내면적인 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갈수록 머리가 커 가는 아이들은 뜻대로 되지 않고 40대가 되고 보니 세상사도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걸 몸으로 느낀다. 그중에 제일은 뜻대로 되지 않은 남편일 거다. 남편이라도 비빌 언덕이 된다면 그 한숨을 같이 나눠지면 되었을 텐데, 내 기억 속 친정아빠는 전혀 친정엄마의 비빌 언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친정엄마가 친정아빠의 비빌 언덕이었지...
여자 나이 40대는 내 뜻대로 살아내기보다는 남편과 아이의 삶이 주축이 되며 자꾸만 내 삶은 저만치 달아나게 된다. 한창 공부할 바쁜 아이들과 한창 일할 남편의 자리를 엄마의 40대는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거다. 나로 살고 싶은 마음 꾹꾹 눌러 담다 보면 어느새 차올라 울분처럼 한숨이 터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나는 요즘이 딱 그렇다. 코로나 4단계로 아이셋과 집안에서 오롯이 살아내다 보니 자꾸만 울분이 들어찬다. 잘 해내다가도 한 번씩 차오르는 울분을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순간이 잦다. 그 순간을 견뎌내며 아이들을 돌보는 극한의 내면 싸움을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겪어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이다. 그래서 비로소 친정엄마가 지나온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친정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친정엄마의 지나간 40대가 그렇게 안쓰러워진다.
남편과 아이들의 자리를 위해 기꺼이 내 자리를 내어주고 그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울분을 삼키며 해야 할 것들에 고스란히 고개 숙인 그 삶을 직접 걸어보지 않고 어찌 그 설움과 울분에 공감한다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딸은 엄마가 걸어온 그 자국을 밟아보고야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엄마의 오래 지난 한숨은 지금 한숨의 시기를 살아가는 내 한숨에 더해져 더 아프기만 하다. 엄마 혼자 짊어진 그 한숨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니 말이다.
친정엄마나 나는 장녀의 책임감을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는 성격이다. 책임이라는 굴레에 한숨을 떠 넘기기보다 인생사 모든 한숨을 떠안고 사는 게 차라리 편한 성격이다. 책임져야 할 것이 많기에 강인하지만 그 강인함이 스스로를 참 외롭게 한다.
나 역시 남편에게 기대기보다는 나 스스로 떠안는 성격이다. 남편이 비빌 언덕이 되지 못해서인지 비빌 언덕이 있어도 기대지 못하는 성격인지는 모를 바이다. 그 한숨의 근간을 열두 살 아들이 건드려 준다. 그리고 닮아간다. 아들 역시 동생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한숨을 내뱉곤 한다. 아들의 한숨은 어떤 결일까? 언젠가 아들의 한숨소리를 듣게 되면 오늘 아들이 나에게 질문을 던진 것처럼 한번 해봐야겠다.
아마도 이젠 한숨을 내쉬기 전 아이들의 동태를 살피게 될 거 같다. 내 한숨에 친정엄마의 한숨이 떠오르듯 내 아이들에게 굳이 엄마 한숨의 기억을 남겨주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