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셋째의 숙명

by 진주
엄마를 꼭 붙드는 셋째의 두 손

오랜만에 아이들과 외출을 했다. 현관문 밖을 나가자마자 6살 셋째는 언제나 그렇듯이 내 손을 꼭 붙든다. 엄마와 한 몸인 듯, 어디서나 엄마에게 딱 붙어 있는 아이인지라 자연스레 나도 손을 내민다.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는데 유난히 엄마를 붙드는 셋째의 두 손이 아련하게 다가와 사진으로 남겨본다.


셋째는 작년부터 죽음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면서 부쩍 엄마 부재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언제 죽어? 엄마가 죽으면 나는 누가 키워?"


라며 잠자리에 들 때마다 혼자 심각한 듯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흐느끼며 잠이 든다. 죽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빈도수가 적지 않았기에 걱정이 됐다.한편으로 셋째에 엄마 존재에 대한 그 마음이 궁금하기도 해서 아이에게 되묻기도 했는데 어느날엔 엄마가 먼저 죽는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며


"내가 먼저 죽을래" 라는 말까지 했다.


사실 셋째가 4살까지만 해도 '아이가 죽어버리진 않을까' 마음속으로 불안에 떨던 때가 있었다. 셋째를 전혀 의도하지 않게 가지게 된지라 많이 혼란스러웠고 친정엄마에게 한참을 말하지 못할 만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임신테스트기를 확인 한 그 주, 교회 예배시간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차라리 죄책감을 지고 평생 살아갈 테니 사라지게 해 달라는 모진 마음까지 신 앞에 아뤄었었다. 그 당시 재취업으로 문화센터에서 피아노 강사로 어렵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지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셋째 임신은 나를 혼란스럽게만 했다. 차마 지울 자신은 없고 그저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으면서 '제발 알아서 사라져라'는 나쁜 생각을 20주 넘도록 내 마음 가장 구석진 곳에 숨겨 두었다.


그렇게 25주까지 아이를 품고 있다가 마침 셋째 예정일과 일주일 차이 나게 임신을 한 친한 동생이 있었는데 그 동생이 25주에 사산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내 주변에 사산을 한 경우가 한 번도 없었기에 너무 당황스러웠고 나와 임신 주수가 거의 같았기에 뱃속에서 잘 자라던 아이가 사라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동안 알아서 사라져 주길 바라며 품고 있던 나쁜 기운이 앙갚음이라도 하는 듯, 친한동생의 사산 이후 나는 밤마다 불안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아이가 사라져야 하는데 친한 동생 아이가 사라진 듯 괜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기 시작했고 아이를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그때 그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품었던 나쁜 마음 때문이지 셋째를 낳고 키우면서 내내 마음 한편이 서늘했다. '아이가 갑자기 죽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그건 내가 나쁜 마음을 품어서라는 죄책감이 내 불안을 더 들쑤시기도 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 한켠을 숨기고 지내다가 조심스레 용기내어 그 나쁜 기운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함께 공부하는 이들에게 쏟아내기도 하고 독학으로 공부하는 심리학을 통해서도 해결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로 셋째 부재에 대한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진듯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셋째가 엄마 부재에 대한 불안을 들어내때면 어김없이 죄책감이 한번씩 고개를 쳐 들긴 했다. 다행히 그 죄책감은 오래 머물지 않고 되려 아이의 마음을 살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등원 거부가 잦았기에 왜 가기 싫은지 물으면 언제나 대답은 똑같다.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아이들이 등원 거부를 하는 이유는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서일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셋째는 유독 심했다. 그리고 괜히 엄마 핑계를 대는 게 아닌 유치원 다녀와서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거나 유치원에서 자꾸 엄마 생각이 났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단순히 '내가 품었던 마음 때문에 아이가 불안을 느끼는구나'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엄마를 항상 꼭 붙들고 있어야 하는 아이의 그 마음이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세 아이 중 유독 셋째에게 마음이 약하다. 아직 알 수 없는 아이 마음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할까?


세아이를 키우다 보니 똑같은 자식이라고 해도 사랑의 모양과 결이 달랐다. 사랑의 크기는 같을지 언정 세 아이에 대한 사랑의 모양이나 결은 가지각색이다. 가장 안정적인 큰아이는 엄마에게 심적인 안정감까지 줄 정도로 정서적으로 잘 자라 주었다. 둘째는 큰아이와 막내 사이에 끼어서 늘 사랑을 갈구하기는 하지만 유일한 딸이라 애정을 많이 표현하며 키웠던지라 사랑이 넘치는 아이다. 그래서 열살임에도 마냥 아기처럼 예뻐 죽겠다. 셋째는 사실 잘 모르겠다. 아직 어린 막내이기에 마냥 이쁘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셋째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숙제로 남은 부분이 있어서 제일 애틋하면서, 한편으로는 밉기도 한 게 사실이다.


이런 엄마 마음이 자꾸만 보여서 셋째는 자꾸 확인하고 싶어 하고 불안에 떠는 것일까? 셋째는 어쩌면 또 다른 내가 아닐까 싶은 적이 많았다. 아이가 좀 더 커서 스스로의 마음을 정확히 비춰줄 때 그땐 비로소 선명하게 답이 보일까? 엄마는 나의 최고의 보물이라며 속삭이는 셋째에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아이에게 안정감을 심어줄 수 있을지가 여전히 숙제다. 어쩌면 셋째로 인해 영원히 숨겨져 있었을 나의 민낯이 많이 들어났고 그걸 고스란히 다 받아내던 아이였기에 엄마에 대한 불안은 정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부모와 아이 사이에 가장 잘 맞는 과정과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인 듯하다. 부모가 되었다고 해서, 내 아이라고 해서 해답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부모는 아이를 살피고 나를 살피며 가장 최적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인고의 시간을 지나고 나면 비로소 서로에게 답이 되어주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셋째와는 아직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찾아가는 과정인 듯하다. 해답이 선명해질 때쯤 서로에게 조금 더 안정되고 가장 충만한 관계가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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