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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씨 Aug 25. 2019

<무진기행>_상실의 공간에 가다

[4人4讀_비밀스러운 독서모임] 김승옥_무진기행_민음사

연재를 시작하며


책덕후 4명이 모여 소소한 소심한 독서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책과 영화를 좋아하고 걸어 다니는 사전으로 불리는 '방식', 대체 하루에 몇 권을 읽는지 알 수 없는 활자중독자 '원희',  우아함과 남다른 안목을 갖춘 '안나', 책을 사랑하지만 읽은 책 보다 산 책이 많아 고민인 저, '소피'는 매달 만나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평론가의 글이나 책 뒤편에 실린 작품해설을 보는 것을 중단하고 우리들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책을 읽고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세상에서 가장 솔직하고 쉽고 편안한 책리뷰라고 자신합니다. 명확한 해석, 답을 찾기보다 작품의 재미를 찾아가는 독서모임입니다. 


각 에피소드는 저, 소피가 책에 대한 전반적인 소감을 정리한 내용과 함께 독서모임 멤버 4명이 나눈 이야기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언제든 책과 관련된 댓글, 소감 환영합니다. 우리 함께 책 읽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김승옥 작가는 1960년대 문학에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은 뛰어난 작가다. 세간의 평가가 어찌 됐건 내가 만난 김승옥은 작가의 말에서 쓴 내용처럼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몰랐던 의미를 찾아주는 일을 했다. 그 조명이 우리가 감추고 싶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비추다 보니 읽는 내내 불편했다.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생명연습, 건, 역사, 차나 한 잔, 다산성,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 , 서울의 달빛 0장 ...그 모두 낯설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였다. 그 시절의 사랑, 배신, 가난, 차별 등을 담아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악착같은 열망도. 


소설에서 여자를 사고, 여자를 경멸하고 무시는 행동을 쉽게 볼 수 있다. 지금 와서는 경악할 만한 이야기지만 그때는 그랬다. 서울을 배경으로 한 곳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당시 종삼골목에 관한 기사(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0225031023)를 읽으면 그 당시 시대적, 사회적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생존한 한 원로 시인은 1950년대의 폐허에서는 명동의 술과 종삼의 여자만이 작가의 고향이었다고 적고 있다'는 내용을 읽어봐도 당시 여성은 철저하게 성적 도구화, 대상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승옥 작가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곱씹게 해 준다. 세상을 향해 발버둥 쳐보기도 전에 꼬꾸라져 바닥만 보고 다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의 '희망'을 철저히 짓밟으면서 우리가 '성찰'하길 바랐다. 


4人4讀



전체적인 소감


방식

다들 재밌게 보셨나요? <무진기행>, 책도 좋지만 저는 영화도 참 재밌게 봤습니다. 추천합니다.


원희

남해여행 갔을 때 이 책을 처음 봤어요. 그리고 두 번째 보는 건데 이번에 보니 더 많이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특히, 주인공이 무진으로 떠나는 것,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픈 그런 마음이 많이 공감됐어요. 저도 남해여행을 갔던 게 많이 힘들어서였거든요. 나 자신이 많이 지치고 힘들 때 무진기행처럼 어디론가 떠나보고 돌아와 보니 책 내용이 이제는 이해가 돼요.


안나

사실 학창 시절 수능 때문에 봤던 작품이었어요. 그때는 점수를 위해 분석하고, 그런 식으로 보다 이번에 작품 자체로만 집중해서 읽어봤네요. 문장이나 표현 같은 게 우울한데 뭐랄까, 모호한 표현이 많잖아요. 그런 부분들이 참 좋다고 생각을 했는데 무진기행 외에 다른 작품들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불편한 게 많았습니다. 여자를 해소의 대상으로 보는,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허용되는 것들을 읽어가는 게 편치 않았습니다.


소피

한국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정서, 표현, 시대상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무진기행은 비겁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어요. 삶을 포장하고 변명하고 살고 있는 주인공을 보면서 제 스스로에 대해서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구멍 나고 거짓된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방식

작가가 어렸을 적부터 겪어왔고, 봐왔던 것들을 고발한 것 같아요. 그 당시 사회에 만연하고 충격적인, 지금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이것들을 담담하게 담아 읽은 사람들로 하여금 각성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미화하는 내용도 넣을 수 있었지만, 굳이 어쩌면 부끄럽고 불편한 것들을 넣은 것은 있는 그대로 사회 풍경을 남기려고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원희

<무진기행> 외에 <염소는 힘이 세다>가 인상적이었어요. ‘염소는 힘이 세다’. 모든 문단이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에요. 염소와 어린 초등학생 꼬마애랑 누나랑 할머니랑 사는데 어떻게 하다가 염소 고깃집을 하게 돼요. 그런데 버스 회사의 어떤 아저씨가 와서 누나를 겁탈해요. 아저씨를 죽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누나는 그 버스 회사에 취직해요. 그 과정을, 그 모든 것을 꼬마애가 다 지켜봐요. 말하자면 성장소설이에요. 부정적인 의식, 무책임의 한계를 어린아이가 깨달아가면서 성장하는. 


방식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 살면서 느낀 무기력함을 글로 쓴 거 같네요.


소피

여성을 비하하기 위해 쓴 게 아니라 비하한 삶을, 세상을 담아서?


원희

<염소는 힘이 세다>는 기승전결 없어요. 그저 흘러가는 거 지켜볼 뿐. 보는 사람들은 이게 뭐야, 할 수도 있는데 사실 이 당시에는 문학이 내가 느끼는 걸 글로 표현하는 게 새로운 방식인 거죠. 의식을 활자화하는. <다산성>도 그렇고요.


방식

내용이 표현주의 영화 같았어요. 라스폰 트리에 감독 영화가 떠올랐어요. 


안나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요조가 <무진기행>에 대해 쓴 글이 있어요.(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292224005&code=960205) 저랑 생각이 비슷하더라고요. ‘새로운 시선으로 읽었다’ 제가 딱 그래요. 예전에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소설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문장들 사이에 불편한 것들이 있어서 이제는 그 부분을 감안하면서 받아 들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여성 혐오나 비하 등으로 읽힐 수 있는 부분이 ‘잘못됐어’, ‘별로야’가 아니라 ‘조금은 변화가 필요할 수 있겠다’인 거죠. 요조가 “나는 아름다운 문학, 옳은 문학을 보고 싶다”는 얘기에 크게 공감했어요.


소피

지금은 고전이라고 부르면서 읽고 있지만 어쩌면 몇십 년 후에는 읽히지 않을 책들이 많을 거 같아요. 


원희

이제는 현명한 독자가 많이 생기고 있다는 거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잘못된 것들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다는 거 보면서 성숙한 독자 의식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사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그리스인 조르바>도 여성에 대한 비하, 성적 대상화가 참 많죠. 이제는 저자의 명성이나 작품성으로만 작품을 보지 않고, 여러 가지 차원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을 비판하고 있어요.



<무진기행>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 또는 문장


소피

p39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원희안나

p26, 27

언젠가 여름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 껍데기를 한꺼번에 맞부빌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 그 개구리 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청각의 이미지가 시각의 이미지로 바뀌어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의 감각 속에서 일어나곤 했었던 것이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반짝이는 별들이라고 느낀 나의 감각은 왜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을까. 그렇지만 밤하늘에서 쏟아질 듯이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보고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었던 것은 아니다. 별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나와 어느 별과 그리고 그 별과 또 다른 별들 사이의 안타까운 거리가, 과학 책에서 배운 바로써가 아니라, 마치 나의 눈이 점점 정확해져 가고 있는 듯이, 나의 시력에 뚜렷하게 보여 오는 것이다. 나는 그 도달할 길 없는 거리를 보는 데 홀려서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순간 속에서 그대로 가슴이 터져 버리는 것 같았었다. 왜 그렇게 못 견디어 했을까.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있던 옛날 나는 왜 그렇게 분해서 못 견디어했을까. 


방식

P31

자살 시체 보는 부분이요. 주인공 정신상태 같았어요. 


 <무진기행> 이외에 좋았던 단편은 


안나

솔직히 없었어요. 무진기행의 임팩트가 컸어요. 나머지는 모호했어요. 아쉽게도 무진기행만큼, 두드러지게 문장이 수려하다, 표현이 아름답다, 특이하다 이런 거를 느끼지 못했어요.


원희

<염소가 힘이 세다> 요. <다산성> 같은 경우 좋은 단편은 아니지만 이로운 단편이라고 생각해요. 작품들이 무의식에 있는, 우리가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한 구조를 열심히 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싶어요.


소피

저는 한 편 한 편 다 재미있었어요. 앞서 얘기한 대로 불편한 게 참 많이 나오긴 하더군요. 불쾌한 것,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 살면서 내가 회피한 것들을 작품을 통해 만났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이 참 많아졌다고 할까. 불편한 것들을 담아내고 끄집어내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안나

그나저나 <다산성>에서 나오는 영감님은 어디로 갔을까요(웃음).


방식

저는 <역사>도 재밌었어요. 영화 <기생충>이 연상되기도 했어요. 빈민촌에 대한 이야기인데 판타지 소설 같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어둡고 음침한 공간들에 대한 묘사들이 좋았어요.


자신에게 무진과 같은 곳이 있다면 어딘가


소피

무진은 나의 고향이자 나의 과거잖아요. 보통 고향이라는 곳이 돌아가고 싶고, 그리운 곳이라고들 생각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죠.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담긴 곳이죠. 저의 무진, 생각하고 싶진 않은, 나의 비겁했던 순간들이 있던 장소와 연관된 사람들이 떠올랐어요. 


원희

주인공이 옛 추억이 서린 공간으로 찾아가잖아요. 그것처럼 사람이 나중에 기억이 고장 나, 치매가 걸려 집을 나가도 추억이 담긴 공간으로 간다고 해요. 음. 무진과 같은 공간, 나 역시 많이 힘들 때 남해를 갔었으니까 나중에 찾는 곳이 남해가 아닐까 싶어요. 사실 장소라기보다 내 의식이, 내 양심이, 모든 걸 벗어던지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공간. 그게 나의 무진인 것 같아요.


안나

무진의 실제 배경이 순천이라고 하잖아요. 아직 순천에 가본 적은 없지만 소설 속에서 묘사한 곳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궁금해요. 무진은 도피, 일탈의 공간이기도 하잖아요. 저는 그게 공항이었어요. 제가 공항에서 일했었는데 공항에는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숨겨진 장소들이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활주로를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인데 밤에 가면 아무도 없어요. 그곳에서 힘들고 할 때 마음을 정리하거나 그랬죠. 


방식

저희 할머니 댁이 있는 시골이요. 저녁에 되면 세상이 암실이 된 거 같아요. 우주공간에 떠 있는 기분도 들어요. 개구리 소리도 들리고요. 그곳은 소설 속처럼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


왜 주인공은 하필 무진에 갔을까


방식

정신적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앞으로 큰 자리에도 올라가야 하니 불안하고 압박이 있고 그랬겠죠. 와이프가 가라고도 했고요. 저는 다시 주인공이 골방으로 들어가서 죽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죠. 


소피

가라고 해서 갔긴 한 것 맞지만 그에게는 불편한 곳이었죠. 그러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재밌는 거고.


원희

자기의 의사를 잘 표하는 못하잖아요. 가라고 하니까 간 거일뿐.


주인공이 느낀 감정은 무엇일까요


안나

‘부끄러움’이겠죠.


소피

부끄러워하면 다행인데 사실 너무 비겁한 사람으로 그려져서, 글쎄 뭐랄까 자신을 끝까지 회피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찬 거 같아요.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게 사실 편하잖아요.


방식

쾌감, 짜릿함. 첫 일탈이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엔 양심의 가책. 무진에서 만났던 여자는 사실  주인공의 분신과 같은 존재 같아요.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대며 살 듯 그녀 역시 타인에게 기대며 살죠. 


원희

저 역시 자기 모습을 그 여자에게 그렇게 씌워서 보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줄평


원희

김건모의 ‘한여름밤의 꿈’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어요. ‘안개 낀 한여름밤의 꿈~~’


안나

도피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부끄러운 자화상.


소피

비겁한 한 남자의 고백. 


방식

나도 무진 찾아가야지! 


1시간여 쉴 새 없이 책 이야기를 나눈 뒤 우리는 종로3가의 세운상가 골목을 걸었다. 그리고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허름한 식당 바깥쪽에 자리하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말로는 하지 못한,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과 감동들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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