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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Feb 09. 2023

꽃보다 나무

푸른 숲과 같은 인연을 만들고 싶다

점심으로 미역떡국을 해서 먹었다. 나 혼자 먹겠다고 요리를 하지는 않지만 마침 어제저녁에 먹고 남은 미역국이 있어서, 아니 사실 일부러 조금 남겨뒀었다. 여기에 떡국떡 한 줌을 넣어주고 보글보글 끓였다. 하얀 떡이 떠오르면 내 눈에도 보이긴 하지만 숟가락으로 저어주면 떡이 떠오르는 게 잘 느껴진다. 이때 들깻가루 한 스푼을 크게 떠서 넣어줬다. 뜨끈뜨끈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 순간 집에서 기르던 화분들이 생각이 났다.


'아 맞다! 물 줘야지!'



결혼 전에 꽃꽂이를 배울 만큼 나는 화분과 꽃을 좋아했다. 특히나 식물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어설픈 성격 탓에 말려 죽이는 일도 허다했었다. 결혼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고 기르고 죽이고를 반복하다 보니 남편은 이제 좀 그만 사라고 말리기도 했다. 나도 이제는 절대 기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작년 봄, 갑자기 또 그놈의 식물이 기르고 싶어졌다. 손끝으로 잎사귀를 만지며 그 싱그러움을 느끼는 것이 좋았고 조금씩 조금씩 커가는 모습 보기 좋았다.



이번에는 정말 잘 보살펴주겠노라 다짐을 했다. 봄과 여름에는 요일을 정해놓고 물을 주었는데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그런 날이다. 한 번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물을 주었다. 그게 몸에 베이니 귀찮은 줄도 몰랐다. 꽃도 피고 잎사귀는 생기가 넘쳤다. 그러나 겨울이 되니 그 루틴대로 물을 주다가는 모두 시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흙이 여전히 축축했고 잎사귀들도 힘없이 축 늘어져 있기도 했다. 하루이틀 물 주기를 미루다 보니 까먹는 일이 많아졌다. 내 눈에 뜨이면 생각이라도 날 텐데 나는 기억으로 사는 몸뚱이다 보니 기억이 나질 않으면 금세 까먹어버리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며칠 전 물을 주려다 흙을 만져보니 아직 축축함이 있어서 다음날 줘야겠다고 생각을 해놓고는 까먹어버린 것이다. 미역떡국을 먹다 말고 화분들에게 물을 주었다. 내가 까먹고 있는 동안 저 화분들은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나는 목이 마르면 물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도 먹는다. 하지만 움직일 수도 없고 소리하나 낼 수 없는 화분들은 흙이 마르고 잎사귀가 말라가는 안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내가 아끼고 보살펴 주는 만큼 잎은 풍성하고 단단해진다. 그러나 조금만 소홀히 하면 금세 시들시들해져서 축 늘어져버린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그런 것 같다. 많이 만나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봐주고, 같이 밥도 먹으며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그 사이는 돈독해진다. 하지만 또 조금만 소홀해져도 멀지고 서먹해지는 게 인이 아닐까?



대구에서 떠나온 지도 어느덧 12년이 되었다. 그동안의 내 인간관계는 많이도 시들었다. 이동이 쉽지 않아 자주 볼 수 없음에 시들고,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이 드물어 시들었다



신기하게도 시든 인연을 다시 살리려는 노력은 누구도 하지 않는 듯하다. 아마 그런 관심과 애정이 남아있었더라면 시들기 전에 물을 주고 살펴보았겠지? 나 역시도 이미 시든 인연에 대한 미련이 없다. 그저 기억 속의 수첩을 꺼내 보며 추억할 뿐이다.



내게는 24년 지기 친구가 하나 있다. 지금껏 지나온 인연들이 꽃이었다면, 내 친구 쑤니는 나무와도 같다. 꽃은 화려한 색깔과 향기로 금방이라도 빠져들 것만 같은 매력을 내뿜지만 조금만 소홀해지면 금세 시들곤 한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시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는 다르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함께 해온 시간이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었고 서로의 고민과 기쁨을 함께하는 추억마다 푸르른 잎이 되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떨어져 지낸 12년 동안 자주 만나지도 못했지만 가끔 하는 전화통화 속에서도 어색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마치 매일 만났던 사람처럼, 어제도 만나서 함께 밥을 먹은 사람처럼 12년 전 그대로 시간 멈춘 듯하다.



가끔은 화려하고 예쁜 꽃도 좋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는 푸르른 나무가 더 좋다. 무더운 여름날의 뙤약볕을 가려주는 나무그늘이 좋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머릿결이 좋다. 그 사이로 잠깐씩 내려앉는 햇볕이 참 좋다. 나도 그런 나무가 되어주고 싶다. 누군가의 힘듦과 기쁨을 함께 하며 항상 그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나무 같은 인연으로 푸른 숲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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