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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Feb 22. 2023

습관에서 의도적으로 하는 말

"여보세요"




이른 아침, 머리를 감으려고 욕실로 들어섰다. 분명 아이들이 화장실을 다녀온 것을 보았으니 여유롭게 씻으면 된다. 먼저 여기저기 뒹구는 욕실화 한쌍을 벽에 기대어 세워주고 나머지 한쌍을 신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왼발만 두 개 신을 수가 있기 때문에 잘 살펴보고 만져도 보고 신어야 한다.


우리 집 샤워기는 1mm의 오차도 용납이 안 되는 극단적인 성격을 지녔다. 조금만 잘못 돌렸다가는 용암의 맛을 보기 쉽다. 그 덕에 4학년이 된 아들을 아직까지 내가 씻긴다. 다혈질의 샤워기를 조심스레 틀어 따뜻한 물로 머리를 적셔주고 샴푸를 짜서 머리카락을 조물조물해 주면 금세 머랭처럼 부드러운 거품이 피어오른다.


한참 거품놀이에 빠져있을 때쯤 첫째 아이가 욕실문을 열고 불쑥 들어왔다. 제발 욕실에서만큼은 혼자이고 싶었다. 왜 하필 내가 욕실에만 들어가면 애들이 응가가 마렵다고 하는 건지 의문스럽다.

"엄마. 미안. 갑자기 응가가 마렵네. 하하. 빨리 끝낼게."


이럴 땐 화장실 두 개인 집이 진심 부럽다. 나는 머리에 거품을 물고 못마땅한 듯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는 나름 예의 있고 재빠르게 볼일을 끝내고 물을 내린 뒤 홀연히 사라졌다. 환하게 비추던 조명과 함께..

"야. 불은 켜놓고 가야지."

"아 맞다."


다시 돌아와서 불을 켜주고 가는 아이에게 "고마워."라고 말했지만 과연 이게 고마운 일이 맞는 건가? 싶으면서도 습관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보면 습관이 되어하는 행동이 은근히 많은 것 같다. "여보세요."는 우리가 흔히 전화를 받을 때 하는 소리이다. 그런데 왜 하필 여보세요 일까? 

"여보세요?"

"여보 아닌데요?"


금해사전 찾아보았다. '여보세요'는 감탄사이며 '여봐요'를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을 쓰면서 발신자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보니 '여보세요'를 생략하기도 하지만 모르는 번호나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통화에서는 여전히 사용하는 것 같다. 특히나 급하게 전화를 받았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1~2주에 한 번씩 통화를 하는 친구가 있다. 오래된 친구라 전화를 받을 때는 "어. ㅇㅇ아." 하며 전화를 받는다. 얼마 전에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나는 빨래를 널다 말고 이름을 대충 확인하고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어. ㅇㅇ아."

"나 ㅇㅇ아닌데?"


순간적으로 내 친구와 우리 시어머니가 언제부터 함께 지내셨던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는 동안 휴대폰을 다시 보았다. 액정에는 '어머님'이라고 떡하니 쓰여 있었다. 눈곱을 덜 떼어낸 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없던 글자갑자기 생긴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나 발전을 해서 발신자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이 생겼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ㅇㅇ아"라고 반말을 했던 것이 잘못이 아니라 대충 보고 지껄인 것이 잘못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러다간 친구에게 "네. 어머님."할판이었다. 차라리 "여보세요" 훨씬 나을  같았다. 얼마나 좋은 단어냐 말이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남자던 여자던 간에 "여보세요."하나면 그만이다. 앞으로도 전화받을 때는 "여보세요."만 해야겠다 생각했었다. 가끔은 습관적으로 했던 말과 행동들을 의도적으로 바꿔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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