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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Feb 21. 2023

엄마의 스무고개

그리고 사랑

'칙칙. 칙칙. 칙칙.'


싱크대 하부장 가장 안쪽에 있던 압력솥이 오랜만에 가스레인지 위에 올라앉았다. '칙칙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뿌옇고 맛있는 김이 연신 뿜어져 나다. 어젯밤 남편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쓰여 행동개시 중이다. 닭과 한약재를 주문하고 깨끗이 손질해서 닭의 응꼬에 마늘과 대추를 넣주었다.



신혼 초에는 닭의 피부결을 만지는 것 자체가 징그럽고 소름이 돋아 내가 닭이 되는 것 같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무장갑은 커녕 맨손으로 닭의 껍질을 훌러덩훌러덩 벗기는 내 모습이 낯설지가 않은 건 왜일까? 어릴 적 시장에서 보았던 동그랗고 커다란 원목도마에 꽂혀있던 식칼을 뽑아서 닭을 팍팍 절단 내던 닭집 아주머니도 처음엔 나처럼 그랬겠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뭐, 맛있으면 그만이다. 가족들이 잘 먹어주면 뭔들 못하.


'아참참. 인삼!'


냉동실에 있던 커다란 인삼 한뿌리도 함께 찔러 넣어주었다. 지난번에 설명 절 때 엄마가 주신 거다. 반찬을 이것저것 싸주시며 인삼도 주겠다는 걸 나는 절대 넣지 말라고 말렸다.


"놔둬. 엄마나 드셔. 내가 사줘도 사주겠고만, 뭘 넣노. 넣기만 해 봐."


집에 와서 보니 반찬들 사이로 인삼 두 뿌리가 보였다. 내가 그렇게 넣지 말라고 했는데도 엄마는 기어이 넣어주셨던 거다.



엄마는 늘 그러신다. 명절이 다가오면 냉장고를 가득 채워놓으신다. 맛있는 게 보이면 사다가 넣고 또 넣어두신다. 그러고는 입이 근질근질해서 전화를 신다.


"별아. 그거 사다 놨다."


"또 뭐?"


"그거 아인나. 백화점에서 줄 서서 사 먹는 거.. 알록달록 하이 이쁜 거."


"하하. 그게 뭔데?"


항상 이런 식이다. 나는 매일 스무고개를 하는 심정으로 통화를 한다.


"아니. 동그란 거. 요새 애들 잘 사 먹는 거 아인나."


"잘 사묵는게 한 둘이가. 하하. 동그란 거? 빵이가?"


"아.. 이게 빵이가? 아인데.. 요거 하나에 삼천 원 넘던데.."


"뭐꼬? 과자가? 아아. 혹시 와플?"


"아이다. 더 작은 거.. 동그랗고 알록달록 하이 이쁜 거. 안에 뭐 그튼것도 들어있."


"아. 알겠다. 정답! 마카롱?!""


"그래. 맞다 그거다. 그거 사다 놨다. 애들 오면 줄라고.. 니도 먹고."


결국 맞췄다. 엄마는 마카롱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유행하고 신기해 보이는 것은 다 사두신다. 과자며, 아이스크림이며, 냉동식품이며, 고기며.. 보이는 것마다 사다가 냉장고에 재어두시고는 우리가 집에 갈 때가 되면 바리바리 싸주신다.



엄마도 알고 계신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리면 세상의 온갖 음식을 집 앞에 배달해 준다는 것을.. 그리고 딸이 알아서 잘해 먹고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엄마는 이 모든 걸 직접 사다가 싸주신다. 가난했던 시절에 많이 못 먹인 것이 한이 되었을까? 아니면 눈도 어두운 딸이 잘 못 챙겨 먹을까 봐 노파심이 난 걸까?



"야야. 별아. 여기 튀김이 얼마나 이쁘게 튀겨놨는지 모른다. 오징어순대도 줄을 서서 사 먹는데.. 아이고.. 이쁘면 뭣하노. 니한테 보내주지도 못하고.. 나만 구경하고 있네. 나만 잘 묵고 댕기네. 안타깝다 엄마는.."


"됐다마. 엄마나 잘 드셔. 일하면서 별 걸 다 신경 쓴다. 우리는 여기서 잘 먹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밥 잘 챙겨 드시고.."



사실.. 엄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나도 그렇다. 맛있는 것, 몸에 좋은 것을 먹을 때면  엄마가 생각이 난다. 아무리 잘 챙겨 먹는다고 해도 혼자 사는 사람이 자기 먹겠다고 닭을 삶고 갈비를 재우지는 않는다. 그래서 먹을 때마다 마음이 쓰인다. 엄마도 그러신다. 식당에서 맛있는 걸 먹고 오면 전화를 하셔서 말씀하신다.


"별아. 다음에 너거집에가면 장어 꾸버묵자. 오늘 엄마가 장어집에 갔는데 참 맛있더라. 윤서방도 좋아할 거다. 다음에 꼭 꾸버묵제이. 엄마가 많이 사갈게."




닭 삶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칙칙'하던 소리도 잦아들고 뚜껑을 열어서 닭과 약재를 건져냈다. 엄마가 주신 인삼은 따로 옮겨두고 닭을 찢어서 찹쌀과 함께 죽을 쑤었다. 대접 네 개에 죽을 담고 남편의 죽그릇에는 인삼을 올려주었다. 다들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들 먹는다. 가족이 잘 먹어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아직 냄비에는 몇 그릇의 죽이 남아있다. 아쉽다. 엄마꼐도 저 죽 한 그릇만 떠주면 참 좋겠다.


엄마가 주신 인삼으로 만든 닭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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