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세다 대학교 (早稲田大学)
일본의 대학교 정도는 유학으로 쳐주지도 않고 잘 알아주지도 않는 냉정한 한국 사회이지만, (古)이병철, (古)이건희 회장의 모교인 덕분인지 와세다 대학교는 한국에서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그 위상을 모르는 이가 잘 없고, 일본의 정계와 재계의 핵심 인사를 꾸준하게 배출해 내는 일본 명문 사학 중 하나이다. 사립대의 왕위를 놓고 한국에서 연세대와 고려대가 경쟁하듯, 일본에서는 게이오기주쿠대와 와세다대가 팽팽하게 각축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에 1968년 입학했으며, 대학 졸업 후 당분간은 집필이 아닌 재즈바를 운영하는 전공과는 무관한 행보를 보였지만, 지금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문학계 최정상에 군림해 있는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다. 그리고 지금 소개할 이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은 그가 살아생전 이룩한 업적과 취향을 한 곳에 모아 놓음으로써 와세다 대학교 학생들에게는 물론, 도쿄에 방문하는 전 세계 팬들에게 영감을 주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문화가 주는 영향력과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 #1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이 평생 동안 집필하며 모은 수많은 책, 레코드(음반), 원고, 번역 자료를 와세다대에 기증했는데 이를 보존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학교 측에서 '하루키 아카이브' 구축을 추진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도서관이다. 건축과 디자인은 하루키의 지인이자 건축계의 거장인 '쿠마 겐고'가 담당했으며, 약 120억 원이라는 막대한 건축비용은 하루키의 와세다 대학교 동문이자 유니클로(패스트리테일링 그룹)의 회장인 '야나이 타다시'가 상당 부분 부담했다고 알려져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 #2
이제는 소설을 잘 읽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어릴 적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글로 번역 출간한 작품 중 안 읽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광적으로 그의 작품에 빠져있었고, 존경하는 영화감독은 이와이슌지,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망설임 없이 주위에 말하고 다니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근데 어디 나만 그랬겠나? 그의 소설은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곳에는 하루키가 소장했던 약 1만 장의 앨범 중 엄선하여 기증한 레코드를 감상할 수 있는 청음실이 준비되어 있으며, 독서와 토론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카페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하루키 월드'라 할 수 있겠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온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유미 오하시'의 판화전 '무라카미 라디오'
아유미 오하시(大橋歩, Ayumi Ohashi)의 판화전인 '무라카미 라디오'가 2층 전시실에서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녀는 미술대학에서 유화를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이며, 하루키의 많은 에세이에 감각적이고 귀여운 삽화를 그려내며 우리에게도 친숙하게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내가 방문했던 이 시점에 운이 좋게도 “Murakami Radio” 시리즈 판화 214점이 이곳에 입수되어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전시회 기간 : 2025년 6월 5일 ~ 20025년 9월 21일)
무라카미 하루키와 그녀의 인연은 2000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 전시회는 하루키 문학의 또 다른 시각적 세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팬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아유미 오하시의 일러스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과 함께 독자들에게 더 풍부한 감각적 경험을 선사했다고 평가되며, 나 또한 하루키의 에세이를 한창 읽을 때에 진중한 문장과 대비되는 그녀의 위트 있는 일러스트를 보는 재미가 책의 매 페이지마다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아직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있으니, 만약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으로서 도쿄에 오게 된다면 꼭 한번 와세다 대학교와 이 도서관을 방문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