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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Mar 17. 2024

꽃샘추위를 통과하는 중입니다.

대기업 정규직에서 홀로 선 프리랜서로

물음표를 지닌 은애 님에게


은애 님, 제가 생각하는 물음표는 용기예요. 지난 회사 생활을 생각해 보면, 늘 어리둥절했던 일은 질문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순간이었어요. 상사의 지시에 의구심이 들어도 묻지 않고 그저 주어진 대로 하다가 일을 다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빈번했지만, 무엇보다 동료 사이에서 오해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서로 의견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늘 아쉬웠어요. 그냥 물어보면 되는 일인데 왜 우리는 질문하기를 어려워할까요? 물어보고 나서 그게 아니었구나 하면 되는 것을, 왜 묻기도 전에 단정 짓고 선을 긋고 말았을까요? 그래서 전 은애 님처럼 물음표를 지닌 사람이 조직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관성대로 움직이던 생각을 잠시 멈추게 해 주니까요. 그러니, 은애 님 제게도 많은 질문을 해주세요. 저도 모르는 사이 익숙한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는 걸 멈출 수 있도록요.


그렇지 않아도 지난주에 상담센터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은애 님의 첫째 아이가 생각났어요. 초등학생이 된다고 했는데 잘 적응하고 있을지 제 마음에도 물음표가 생겼답니다.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한다는 은애 님에게 받은 편지 내용에 마음이 아팠어요. 그 마음을 꼭 알 것 같았거든요.


저 역시 익숙하지 않은 요즘을 보내고 있어요. 편지를 쓰는 오늘이 퇴직을 한 지 213일이 되는 날이더라고요. 대기업에 근무했던 터라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쟁이 생활을 자그마치 십 년을 하다가, 집에 마련한 작은 작업실에서 종일 홀로 근무를 하며 일정하지 않은 수입으로 생활을 한 지 이제 막 반년이 조금 넘은 셈이에요. 회사를 다니면서도 개인 작업을 꾸준히 한 덕분에 퇴직 후 몇 달간 꽤 잘 적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올해 들어서 유난히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너무 심심하고 너무 불안했어요. 가뜩이나 사람들을 좋아하는 성향인데 집에 혼자서 일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생활비도 되지 않는 수입을 지난 십 년 동안 매년 오르던 월급과 비교해 가며 마음이 조급해져서 밖으로 나가 기분 전환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만 했고요. 아직 모아둔 돈이 넉넉히 있는 편인데 계속 채찍질을 하면서 말이에요. 급기야 이런 생각에 이르기까지 했답니다. 나, 마음이 가난한가 봐.


최근 오랫동안 프리랜서 생활을 한 친구와 상담 일을 하며 만나게 된 슈퍼바이저와 이 고민을 나누다가 제 불편한 마음의 정체를 알아차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느끼는 심심함과 불안이 익숙하지 않음에서 온 것이라는 점이었어요. 정말 말 그대로 수입이 안정적인 조직 생활에서 홀로 선 프리랜서 생활로 적응 중이기에 든 자연스러운 감정인 거죠. 어쨌든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혼자 하는 일이다 보니 이 일이 좋아서 시작한 이상 이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외에 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네, 저는 지금 견디고 있어요. 이 심심함도 익숙해지길, 이 불안함도 익숙해지길. 다만, 이 기분에 잠식되어 괴로워지지 않도록 혼자서 즐겁게 생활해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을 떠올려 봤어요. 저는 꽤나 혼자 잘 놀던 사람이었거든요. 아무리 사람을 좋아한다 한들 주말만큼은 홀로 있기를 자처했습니다. 좋아하는 디저트를 파는 비건 카페에 가서 당 충전을 하며 글 한 편의 초고를 쓰기도 하고, 날이 좋은 날 캔 맥주 하나를 사 들고 한강 둔치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계절에 맞는 꽃을 사 와 식탁을 꾸미고 구태여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해서 스스로 대접해 주면서 말이에요. 지금은 단지 혼자 지내는 시간이 주 일상이 되어 혼자 보내는 시간의 특별하게 보내던 마음가짐을 놓친 것일 뿐이더라고요.


정성스레 달래를 손질해서 봄기운 가득한 파스타를 만들었어요.


며칠 전부터 혼자여도 재밌게 잘 지내던 때를 기억해 내며 지금의 생활에 녹일 수 있도록 하나 둘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퇴직하면 이런 생활을 더 많이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일만 엄청 열심히 하고 있었더라고요.(하하) 흑, 역시 저는 일 중독인가 봐요.(절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제게 너무나 익숙한 생활 습관이라 덜어내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음, 일을 덜 하기에 익숙하지 않은 저는 이것도 익숙해지도록 노력해보고 싶어요. 주어진 오늘 하루를 덜 충실하게 살기! 은애 님, 제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어제는 그림을 스캔하러 을지로에 갔다가 일부러 청계천을 걷다가 왔어요.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천 위로 쇠백로가 유유히 날고 있었고 수많은 꽃눈 사이에 이미 핀 산수유 꽃을 보며 정말 봄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얼마 전 찾아온 꽃샘추위를 잊어버릴 정도로 가벼운 날씨이기도 했어요. 살랑이는 원피스에 짧은 외투 하나 걸쳐도 거뜬할 만큼요. 게다가 좋아하는 빨간색 플랫슈즈를 신어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설렜습니다. 오랜만에 느껴본 설렘이었어요.


청계천에 온 봄을 은애 님에게 선물해요.


문득, 제가 지금 견디고 있는 이 시기가 꽃샘추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봄의 따듯함을 마주하기 위해서 견뎌야만 하는 시기인 꽃샘추위처럼 저 역시 새로운 생활과 환경에 익숙해지기 위해 견뎌야 하는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가끔 울적하더라도 잘 이겨내 보려고요. 곧 지나갈 시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그러니, 은애 님의 아이에게도 이야기해 줄래요? 바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운 날을 보내는 건 어린아이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네가 보기에 단단해 보이는 어른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다고. 그러니, 네가 느끼는 그 힘든 마음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주라고. 어쩌면, 네가 커서 어른이 되고 할머니가 되어도 그럴 수 있다고. 감정은 감정일 뿐, 잠시 왔다가는 것일 뿐이기에, 힘든 감정은 잘 다독여주면 금세 미소 짓고 네 마음을 떠날 거라고. 엄마의 친구도 그렇게 스스로 괜찮다며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에요.


은애 님의 아이와 은애 님 그리고 제가 통과하고 있는 이 꽃샘추위를 잘 기억해 두면 좋겠어요. 우리의 봄이 그냥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요. 그럼, 우리의 봄이 더 선명하게 느껴질 것 같거든요.



2024. 03. 15.

봄이 찾아온 한낮의 카페에서,

은영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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