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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키드 Mar 24. 2024

어느 날 마음이 툭, 끊어지고 말았어요

조금만 더 나아가려다 찾아온 번아웃

은영님에게.


 이제 정말 봄인가 봐요. 동네에도, 출근길에도 꽃들이 하나둘씩 피어나는 걸 보니 계절의 변화가 느껴져요. 꽃이 피기를 시샘하는 추위라는 꽃샘추위도 이제 다 지나간 것 같아요. 따뜻한 봄이 온다고 생각하니 설레는 마음입니다. 생각해 보니 계절이 바뀔 때 찾아오는 봄의 꽃샘추위나 늦여름 무더위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하게 건네는 인사 같아요. 우리가 익숙한 것과의 이별에서 진통을 겪듯 계절도 그러한 게 아닐까요?


저희 집 앞에도 어느새 봄을 맞이하는 벚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환절기에 날씨 변화에 신체가 적응을 못하면 감기에 걸리듯, 여러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음에도 고장이 날 수 있잖아요? 요즘 제가 그렇답니다. 잠이 오지 않던 이번 주 어느 밤, ‘이건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태다'라는 확신이 들어서 급히 휴가를 내고 병원에 다녀왔어요. 긴장하며 방문했던 것과는 달리 편안한 분위기에, '마음이라는 장기가 있는 게 아니니 그저 뇌의 신경 전달이 원활하게 되고 있지 않은 상태'라고 오히려 이 상황을 담백하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되더라고요. 내 잘못이다, 내가 나약한 거다라는 자책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아 위안이 되었어요.


 요즘의 저는 제가 가진 에너지의 한계를 크게 느끼고 있어요. 아이 키우면서 나도 키워야겠고 아내, 딸, 며느리 등 여러 역할을 어떻게든 잘 해내보려던 와중에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치가 너무 버거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제 회사에 출근해서 현재 이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잘 못하는 나, 모르는 나도 괜찮다', '때로는 주위 사람들에게 의지해라'라는 말들을 해주시더라고요. 지금은 어떤 말을 들어도 마음이 취약한 상태이지만, 저 말들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더라고요. 그동안 나름 내려놓는다고 했는데 여전히 스스로 너무 애써왔나 봐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보자고 스스로 다독이다 어느 순간 마음이 툭- 끊어진 기분이 들었어요. 그 이후로는 무기력, 냉소주의, 감정의 격해짐을 겪다가 두근거림, 수면장애, 위장병이 나타나며 깨달았어요.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은 유감이지만 한편으로는 시그널을 알아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렇게까지 가보지 않았다면 저는 계속 고민만 안은 상태로 현재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을 거예요.

 'Everything happens for me.'라는 말이 있듯, 이런 일이 생긴데도 다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 믿어요.


 최근에 힘들 때 찾아봤던 영상이나 책에서도 그렇고, 저희 아빠도 이전에 제가 고민이 있을 때면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10년 뒤의 네가 지금 이 고민을 돌이켜봤을 때도 지금처럼 심각하게 여길까?'

요즘 자주 심각함에 빠지는데 저런 어른들의 말이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그러면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재밌게 살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을 해야 재밌을까?'를 궁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돌이켜보면 뭐든 ‘잘’ 선택하고 싶어서 심각해졌더라고요. 정답 같은 선택이 있을 거라 착각하며, 그게 뭘까를 고민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왔어요. 주변에서 하는 말들, 사회적인 인식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완전히 배제하며 생각하진 못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런 걸 다 떠나서 나에게 재미있는 선택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보니 상상만으로도 너무 즐거워지는 거 있죠? 지난주에는 그 생각만으로도 이틀은 거뜬히 즐겁게 보냈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재미있는 선택에 집중하며 살아보자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얄미울 정도로 재밌게 살고 싶어서 그 마음을 담아 새 좌우명도 지어봤어요. '얄밉게, 재밌게!'


 힘든 상황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주변에 말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참 희한하게도 어제 회사에서 말하고 오늘 이렇게 은영님에게 편지를 쓰다 보니 꽤나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분명 월요일이 되면 저는 또 같은 삶을 살고 있을 텐데 조금은 더 견뎌낼 용기가 생기는 것도 같아요. '주변에 나를 지지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나는 왜 이럴까?'라는 생각도 저를 괴롭게 하는 생각 중 하나였는데 때로는 취약한 나도 받아들이고 좀 기대며 사는 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보려고요.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앞으로는 나아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다음 주면 꽃샘추위도 지나가고 완연한 봄 날씨가 찾아온대요. 집 앞에 피어난 꽃들을 보고 너무나 반가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자꾸만 착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일으켜보려 하고 있어요. 당분간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줄이기 위해 주변 풍경들의 변화를 관찰하고 느껴보려고요. 다음번에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은영님도 따듯한 봄 누리기를 바랄게요!



- 24년 3월 24일 일요일 밤



토요일 새벽, 잠 깬 김에 미리 써둔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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