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 오베르 쉬르 우아즈
"사랑에 빠지기 좋은 도시야.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오고 싶을 정도로."
처음 파리의 밤을 보았을 때, 나는 한인민박에서 만난 한국인 언니들과 함께 있었다. 이제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언니들 중 한 명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곳을 다시 오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한편으로 파리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의 막연한 소망에 나 역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해 겨울, 거짓말처럼 정말 파리를 다시 찾게 되었다. 소망과는 다르게 이번에도 혼자였다. 이곳에 온 까닭은 다름 아닌 까미노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산띠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 길을 선택한 나는 테제베를 타고 바욘을 거쳐 생장피드포르로 가기 위해 파리에 머물게 되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첫 번째 까미노를 앞두고 나는 지난봄에 고흐를 만났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떠올렸다. 사실, 산띠아고 순례길과 빈센트 반 고흐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고흐에게 배웅을 받고 싶다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를 보러 가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바람이 몹시 불어오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였다. 다시 만난 고흐에게 인사를 건네고 보니 그의 앞에 놓인 꽃다발과 쪽지가 눈에 띄었다. 마침 그날은 크리스마스였다. 누군가 그에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고 간 것이 분명했다. 빈손으로 온 내가 왠지 부끄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지난봄에도 같은 자리에 누군가 꽃을 두고 간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고흐에게 까미노에 다녀와서 다시 이곳을 오겠다고 약속했다. 작은 쪽지로는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다짐까지.
나는 익숙한 거리를 대하듯 마을을 주저 없이 걸어 다녔다. 어느덧, 세 번째 찾게 된 오베르 쉬르 우아즈. 고흐가 그림으로 담았던 밀밭에 난 샛길을 따라 걸었다. 한 손에 있던 꽃다발을 들고 해바라기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고흐에게 선물하려고 바스티유 시장에서 사 온 것이었다. 그에게 줄 꽃다발에는 반드시 해바라기가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날이 좋아서인지 꽃이 더욱 싱그러워 보였다.
가벼운 바람에 밀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동생 테오와 함께 잠들어 있는 고흐가 그 끝에 있었다. 준비한 꽃다발을 그에게 건넸다. 12년 만에 지킨 약속이었다.
하지만, 약속과 다르게 나는 고흐에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얼굴을 따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저 내가 여기 다시 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를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았는데 어떤 말이든 해보려고 열었던 입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닫아버렸다. 마치 나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12년 전의 오래된 여행기를 떠올리는 것이 버거웠을까? 아니, 내가 고흐에게 전할 말은 구체적인 어떤 문장이 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까미노를 무사히 다녀와 그의 앞에 다시 선 것으로, 그리고 두 번째 까미노를 앞두고 그를 다시 찾아온 것으로 이미 충분했으니까.
고흐에게 이번에도 잘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했다. 재회의 인사와 마찬가지로 작별의 인사도 두 번째 순서로 테오에게 건네던 순간, 그제야 테오에게 줄 꽃을 준비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고흐의 옆에 항상 있는 테오였는데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곧 시작이 될 두 번째 까미노는 내게 어떤 의미의 여정이었는지 이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나는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래, 다음에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오게 될 때, 그때에는 잊지 않고 테오에게도 꽃을 전해줘야지. 이곳을 찾을 때마다 테오의 앞은 늘 비어져 있던 것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테오가 고흐보다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네 번째 만남을 기약하며 자리를 떴다.
"고흐 아저씨 잘 만나고 왔나?"
고흐를 만나러 간다고 자신의 원피스까지 빌려 입고 간 딸을 반겨주며 엄마는 물었다. 방금 전,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봤다며 아이처럼 자랑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파리에 다시 오고 싶다는 소원이 이제야 이뤄졌구나, 생각했다.
Day -2. JUN 7, 2024
Auvers-sur-O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