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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Sep 04. 2024

자신감과 오만함 사이

Day 1. 생장 피드 포르 → 론세스바예스

아무래도 두 번째 까미노인 터라 그랬을까? 나는 좀 신이 나 있었다. 익숙했고 편안했다. 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에게도 자신 있게 '부엔 까미노' 혹은 '부에노스 디아스'(Buenos días, 'Good morning'에 해당하는 '좋은 아침'의 스페인어)로 인사를 건넸다. 겨울에 까미노를 걸었을 때와 달리 앞뒤로 수많은 순례자를 곁에 두며 걸으니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뒤로 의지하며 걷는 순례자들

"빠라 미, 세군도 까미노 데 산띠아고."


어느 스페인 순례자들과 나는 짧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세군도(Segundo)'는 스페인어로 두 번째라는 의미이고, '빠라(Para)'는 영어의 for 혹은 to에 해당하는 말이며, '미(mi)'는 나를 뜻한다. 이번에는 엄마를 가리키고 "꼰 마드레"라고 덧붙여 말했다. '꼰(Con)'은 영어의 with를, '마드레(Madre)'는 엄마를 말한다. 즉, 내가 이 여정이 엄마와 함께 걷는 두 번째 까미노라는 뜻을 전한 것이다.


지난 12년 전 까미노에 첫 발을 디딘 나는 스페인어로 인사말도 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문외한이었다. 여태 다닌 여행처럼 여행용 영어 회화의 수준만 구사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도시가 아닌 시골 마을 길을 따라 걷는 까미노에서 스페인어가 필수였다.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이 되어 영어가 잘 통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때는 사정이 달랐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 까미노를 걸으며 자주 접한 스페인어는 익혀두려고 애를 썼다. 간단한 단어만 익혔을 뿐인데 메뉴를 주문하거나 길을 묻고 날씨를 확인하는데 내 말이 제법 통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행용 회화가 다 거기서 거기란 것을 알지만 내 어설픈 스페인어가 쓸모가 있다는 사실에 마냥 신이 났다. 모르는 표현은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배우며 나는 스페인어를 알아갔다. 그 시절의 기억이 좋았던 걸까? 나는 까미노를 마치고 나서 한국에 돌아간 뒤로도 내가 어디에 있건 스페인어가 들리면 일단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버릇이 됐다.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뭐라도 그들에게 건네보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다.


여름의 피레네


여름의 피레네는 내 기억 속에 있는 겨울의 피레네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노랗게 바랜 들 위에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산은 온데간데없고 짙은 푸른색으로 눈이 부셨다. 선명한 색의 마디마다 생명이 싱그럽게 돋아나 있었다. 나의 마드레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기분이 좋을 때 노래를 부른다. 한 손에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걷는 길을 영상으로 담으며 걷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며 시야가 가려졌다. 안개가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에 의지하며 걸어야 했다. 두꺼운 커튼과 같은 안개 사이로 희미한 종소리가 새어 나오면 그제야 안심이 됐다. 목초지에 풀어놓은 양이나 말이 어슬렁 거리며 풀을 뜯을 때마다 짤랑이며 나는 소리였다. 하늘을 가르는 기척과 함께 들려오는 새의 노랫소리는 마치 우리에게 건네는 격려의 말 같았다. 앞서 걷는 순례자들이 걸을 때마다 나는 발자국 소리, 땅에 스틱이 닿으며 나는 톡톡 거리는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대화 소리에 길의 방향을 찾기도 했다. 이 순간만큼은 길 위의 모든 소리가 순례길을 안내하는 노란색 화살표를 대신하고 있었다. 


국경을 너머 론세스바예스로


피레네의 푸른색이 점차 흐려질수록 우리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이 나바라 주라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을 만나게 되었다. 피레네를 넘어 도착하는 론세스바예스는 스페인의 나바라 주에 속한다. 즉, 몇 시간 후에 엄마와 내가 론세스바예스에 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앞으로 내려가는 길만 남은 셈이었다.




두 번째라는 익숙함에 속아 너무 자만했던 걸까?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에 도착해 침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엄마를 보며 견딜 수가 없었다. 피레네를 오를 때만 해도 어렵지 않게 걷던 엄마는 하산 길에서 눈에 띄게 지쳐있었다. 모든 산행이 그렇듯 하산길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지만 나이를 먹은 엄마는 그보다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 때문에 엄마가 내딛는 걸음마다 지켜보는 내 가슴도 졸여왔다. 엄마와 800km를 완주하겠다는 자신감이 실은 오만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괴로웠다. 


"이렇게까지 힘들지 몰랐어!"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며 내내 누워있다가 엄마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엄마의 까미노 가이드로서 계속 스스로 책임을 묻던 나는 그 말에 스멀스멀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이미 수차례 이 길이 얼마나 고된 여정인지 엄마에게 설명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몰랐다는 거지? 오히려, 그 말을 가볍게 듣고 준비를 꼼꼼히 하지 않은 것은 엄마가 아닌가.


우리는 함께 까미노를 가기로 결정한 후, 세 개의 계절을 보냈다. 나와 먼 곳에 떨어져 사는 엄마에게 틈틈이 전화를 걸어 엄마가 까미노 준비를 잘하고 있는지 묻곤 했다. 꾸준하게 운동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내 말에 그때마다 엄마는 그렇다고 답했으나, 실은 산책 삼아 동네를 걸어 다니는 것으로 때웠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준비가 부족했다고 지적하는 내게 평소 부지런히 걷기를 한 덕분에 이만큼 걸은 거라고 엄마는 박박 우겼다. 이만큼? 이제 오늘 하루 걸은 건데? 앞으로 대체 어떻게 하려고! 단순히 걷는 것과 긴 시간 동안 먼 거리를 걷기 위해 근육을 기르는 운동은 다르다고 차근히 설명해줘야 했을까? 아니면, 내가 조금 더 단호했어야 했을까? 이런 식으로 까미노를 준비하면 갈 수 없다고 못을 박아서라도 말이다. 


이번 여행을 제안하고 계획한 나로서는 엄마의 힘듦이 좀처럼 용납되지 않았다. 프랑스길의 800km를 꼭 완주할 필요가 없으니 짧은 코스를 정해서 걸어도 된다고 이야기했을 때, 모든 코스를 다 걸어서 완주하고 싶다며 소망을 내비친 엄마였다. 그러나, 피레네를 넘는 나폴레옹 코스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며 설레어하던 엄마의 모습에 독하게 마음먹고 엄마의 체력을 생각해서 우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은 것은 나였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젊을 때, 엄마가 바라는 것을 함께 해보고 싶은 내 욕심이 우리의 여정 곳곳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래, 이건 내 탓이야. 그렇게 복잡한 마음을 닫아두려 했지만, 앓고 있는 엄마를 보면 다시 이 모든 것에 대한 원망을 엄마에게 돌리고 싶었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해서 올 거였으면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야 했던 것이 아니냐고 따져 물을 작정으로. 그러니까, 엄마의 다리가 아픈 건 다름 아닌 엄마 탓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이 짜증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나는 너랑 다르다. 너는 젊잖아!"


내 짜증에 억울하다는 듯 엄마는 나의 젊음을 가리켜 말했다. 너는 젊어서 쉽게 할 수 있는 거라고. 나는 다시 반박했다. 12년 전 나는 지금보다 더 젊었지만 오늘보다 더 고통스럽게 걸었다고. 지금의 나는 산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그때의 나는 트레킹 경험은 전후무후한 사람이었으니까. 당시의 나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피레네를 넘을 수 없는 체력이었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큼 평소에 준비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나는 얄짤없이 따져 들었다. 누구에게나 마냥 쉬운 것은 없다며.


그러나, 이 대화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까미노를 준비하는 시기에 충분히 나눴어야 할 대화였으니 말이다. 차라리 올레길을 일주일 정도 걷거나 한국에 높다고 알려진 산을 함께 다니며 엄마의 의지나 체력을 판단해 가며 여행 계획을 세웠더라면 달랐을까? 그랬다면, 800km 완주나 나폴레옹 코스 등 상징적인 의미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맞는 경로를 설정했을지도 모른다. 역시 이 길은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일깨워준다. 


"너, 이제 여기 다시 올 생각 말아라."


엄마는 난데없이 내게 까미노 금지령을 내렸다. 아직 세 번째 까미노는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아니, 갑자기 왜? 납득할 수 없는 엄마의 선언에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내 여행에 대해 엄마가 왜 결정을 하냐며 심술을 부릴 겨를이 없었다. 그런 시비를 가릴 세 없이 마음이 분주했으니까. 나는 엄마와 함께 800km를 완주할 수 없겠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모든 여정을 재검토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고통 속에서 걷느니 까미노를 포기하는 것이 맞겠다고. 예정보다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는 선택지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의 론세스바예스


엄마와 추억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지,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엄마가 침대 위에서 뒤척이며 내는 신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내 젊음을 가리키며 자신과 구분 짓던 엄마에게서 늙음을 나는 오늘에서야 똑똑히 보았다. 난관 투성인 이곳에 와서 엄마의 늙음을 부추기게 한 것은 아니냐며 스스로 꾸짖는 것에 지쳐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당장 다가올 내일마저 가늠할 수 없는 질문에 그 어떠한 답도 내리지 못한 채 겨우 잠에 들었다.



Day 1. JUN 10, 2024

St. Jean Pied de Port to Roncesvalles, 25.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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